고요한 어둠이 방안을 적실 때, 따뜻한 조명 아래 맛있는 향, 밝은 공기가 들어오는 곳이 있다. 도시의 밤은 그곳을 미련 없이 벗어나고자 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나 너무나 빨리 잊혀갈 때, 그 밤을 오랫동안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밤길에 두둥실 떠오르는 행등 같은 심플한 간판, 형형색색 밝은 빛 아래 바깥으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 안으로 들어가면 느껴지는 고소한 수프와 버터 향을 결들인 진한 고기의 향, 밤길에도 늘 따뜻한 요리를 내오는 주인의 손길과 가감 없이 가게에 발을 들이는 누군가의 발걸음.
“여기서는 어깨에 힘을 빼고 요리를 즐겨주세요.”
풍미 가득한 향에 취해 밤새도록 켜 놓는 등, ‘키친 상야등’이다.
바야흐로 혼밥의 시대다. 아니 사실 꽤 오래되었다. 여럿이 함께 모여 왁자지껄 식사하고 공동체를 강조하는 문화는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자율 참석이 늘어나고 굳이 가려는 사람은 잡지 않는 것이 흔해진 시대에서 혼자 밥을 먹는 건 이제 너무나 익숙하다. 볼 수 있는 정보가 즐비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한 세상에서 길게 늘어진 식탁에 혼자 앉아 휴대전화와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 참 쓸쓸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다양하게 잘 즐길 수 있는 삶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꽤 까다롭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기엔 어색하니 화제를 꺼내려고 밥을 먹으며 머리를 동시에 굴리며 대화를 이어가려는 노력이 수반되는 관계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에게 함께 식사를 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한 끼를 때우자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그저 한 끼 식사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정서적 연결과 감정 공유를 하는 소중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애매모호한 누군가와 나중을 기약할 때 ‘다음에 또 보자’라는 말은 형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다음에 만나서 같이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난 어색한 사람이랑은 밥을 못 먹거든. 그만큼 나에게 ‘밥을 먹는다’라는 의미는 꽤 넓고 깊은 뜻을 내포한다.
키친 상야등이라는 식당은 보통 식당과 다르다. 아침에 열고 저녁에 닫는 일반적인 음식점과는 달리, 아침까지 영업한다. 그 이유로 하루를 흘러가듯이 떠나보내기 아쉬운 사람도, 막차를 놓친 사람도, 저마다의 이유로 마음이 힘든 이들도 모두 키친 상야등의 손님이 된다. 주인은 언제나 정겨운 표정으로 손님 한명 한명을 정성스레 맞이한다.
집에 불이 나서 하루아침에 살 곳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직장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착잡한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로 이곳에 들르게 된다. 혼자서 속앓이를 하고 남에게 자신의 사정을 곧이곧대로 말하는 걸 꺼리는 주인공은 완벽한 타인인 식당 주인들에게 자신의 사정과 살아온 나날들 그리고 걱정거리들까지 터놓게 된다. 불면증을 앓는 그는 이제 잠이 안 올 때마다 키친 상야등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는다.
키친 상야등은 다양한 사람의 삶이 음식과 함께 조각처럼 담겨 있다. 여유를 잃고 승진까지 악착같이 달려간 사람에게는 뿌듯함을 비롯한 행복에 대한 의문이 담겨 있다. 가정을 꾸리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친구들에 비해 일만 하며 얻어낸 그의 삶은 향신료와 허브를 이용한 어린 양고기 요리와 함께한다. 그간의 일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필요할 때 몸을 보충하고 향긋한 향에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지난 과정이 보인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의 모습은 공허하지만 남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오랫동안 지병을 앓아온 남편을 간호하며 밤마다 이곳에 들러 간단한 수프만을 먹던 여자는 남편과 사별한 날 소의 위 조림을 먹는다. 생전 남편을 그토록 괴롭힌 위를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다는 그녀는 맛이 제대로 배어든 위 조림을 말없이 산산조각내며 씹는다.
삶의 조각을 키친 상야등에 기꺼이 내놓은 그들의 정서적 연결은 식사를 하며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레 공유하는 것에 있다. 식당 주인은 그들의 삶 전반을 먼저 묻거나 궁금해하는 티를 내지 않는다. 늘 들르던 손님이 오지 않을 때도 항상 그가 먹었던 요리를 정성스레 만들 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손님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촘촘히 묻지 않는 건, 그들이 건네는 위로의 또 다른 형태로 자리매김한다. 그들은 위로의 말 한마디 보다, 같은 자리에서 따뜻한 무언가를 건네는 일에 더 익숙하다. 식당에 들른 사람들은 말 한마디의 부담이 아닌, 정성 가득한 요리를 삼키며 긴 밤을 위로받는다.
삶의 다양한 길에서 혼란스러운 이들에게, 소중한 이를 영영 떠나보낸 이들에게 어떻게 위로와 다정함을 건네야 할지 망설였던 적이 있다. 슬픔은 기쁨과 달리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쉽사리 말을 붙이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찾아와 밥을 먹는, 먹어야만 하는 삶을 통해 인간 본연의 굳은 의지를 맛보는 것도 식당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래도 버텨야지’, ‘살 사람은 살아야지’와 같은 냉정한 말이 아니라, 깊은 밤에 온기를 삼키는 일은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것이야말로 밥을 먹으며 한 끼를 때웠다는 사실보다, 과거를 떠나보내고 현재를 살아갈 힘을 만들어주는 희망을 내뿜는다. 다양한 방면과 형태로 소중함을 잃은 이들이 정성을 담은 무언가로 삶 전반을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속에서 조금씩 피어나는 희망은 또다시 나타날 소중한 무언가로 보상받는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어가면서 살아가는 존재야. 그런데 희한하게도 또 다른 소중한 게 나타나. 지키고 싶은 건 절대로 없어지지 않으니 참 신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