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를 알고 있는가? ‘열쇠로 잠그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외부와 차단된 교황 선거 장소를 뜻하기도 한다. 실제로 선대 교황의 선종이나 사임으로 교황청 최고위가 공석이 되면 15일에서 20일까지 전 세계 추기경들이 로마에 도착하기를 기다린 뒤, 교황 선출을 위한 봉쇄 회합이 시작된다. 이때에는 외부의 차단을 막고자 TV나 여러 통신 수단은 모두 이용 불가다.
투표는 오전과 오후 각각 두 차례씩 실시되며 교황 당선을 위해서는 선거인 2/3 이상의 득표율이 요구된다. 투표 종료 후에는 투표지를 불태우는 과정이 시행된다. 이때 교황이 선출된 경우 흰색 연기를, 미결일 때는 검은 연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외부에 투표결과를 알린다. 이는 현재에도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여 실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故) 김수환 추기경이 콘클라베에 참석했다.
우리나라 수능 출제 과정을 연상케 하는 콘클라베는 교황 선출을 위해 이토록 심혈을 기울인다. 영화 역시 제목과 마찬가지로 여러 교황 후보자가 봉쇄된 장소에서 교황 자리를 두고 벌이는 사건들을 제시한다.
신성한 공간에서의 폐쇄성
교황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알리며 영화가 시작되고 이후 콘클라베가 시작된다. 콘클라베의 총괄을 맡은 단장 ‘로렌스’를 중심으로 교황 후보는 신속히 좁혀진다.
가톨릭의 정통성을 고집하는 보수파 유력후보 ‘테데스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개혁파 ‘벨리니’, 유럽이 중축인 교회의 변화를 강조하며 급부상한 나이지리아 출신 ‘아데예미’ 그리고 그와 맞서는 ‘트랑블레’까지. 공약 내용과 선거 운동만 없을 뿐 현실 정치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세속적 권력에서 벗어나 교회의 선익을 위해 뽑는 가장 신성한 자리는 영화가 전개될수록 각 후보의 결함을 들추고 파가 나뉘어 편을 먹는 권력 싸움으로 탈바꿈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자격을 의심하고 잘잘못을 따지며 그것을 밝히는 지경까지 이른다. 영화가 후보자의 행적과 내면을 하나씩 들춰낼수록, 하느님의 부름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리에 정말 적합한 자가 있는지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가장 유력한 선두에 올라선 아데예미는 수녀와의 성 추문으로 인해 혼외자의 존재를 삼십 년간 숨겨온 사람이었고, 트랑블레는 성직매매와 표 매수로 인해 불미스러운 사건에 얽힌 이력이 있는 자였다. 그나마 로렌스가 믿었던 개혁파 유력후보 벨리니 역시 자리 제안에 넘어가 권력에 욕심을 두고 있는 자였다. 누구 하나 청렴결백한 이가 없다.
어떤 통신망도 불가할 만큼 보안까지 철저히 지켜가며 뽑는 근엄한 자리가 현 사회 정치 권력의 축소판이었다는 사실은 그 폐쇄성에 비웃음을 더할 뿐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교회의 폐쇄성이 적용되는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교회 내부에는 교황 자리를 두고 파벌 다툼을 벌이는 추기경뿐 아니라 수녀들도 함께 자리한다. 다만 영화에서 수녀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 추기경의 식사를 비롯한 교회 전반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하지만, 투표권이 없는 건 물론이고 그들 공간의 통신망 역시 자유롭다. 크게 목소리를 내는 추기경과는 달리 영화 속 수녀의 대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성 추문과 연루된 수녀는 엄연한 피해자지만, 그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피력할 수 없다. 수녀들을 대표하는 인물인 ‘아그네스’는 중요한 증언을 하기에 앞서 “수녀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눈과 귀를 주셨다.”라고 말한다.
교회와 교황의 대전제는 하느님의 응답으로 인해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런 교회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위치와 그와 대비되는 자리가 명확히 갈린다니. 속세에 있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이곳에서 폐쇄성이란, 허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치명적인 적일 것이니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다양성이고,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대망의 콘클라베 첫째 날, 단장 로렌스는 투표하기에 앞서 진심 어린 연설을 한다. 실제로 그는 단장으로서 자신의 자격과 더불어 여러 후보의 적합성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보수파가 교황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개혁파에게 표를 주어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에도 그는 중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에게 표를 주겠다는 다른 추기경의 말도 정중히 거절하며 교황 자리의 적합성에 맞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그런 그가 고심 끝에 자신에게 표를 행사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건물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 끝없이 자신의 자격을 의심한 그가 마침내 확신으로 마음을 굳혔을 때의 투표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과연 정말 교황에 적합한 자는 누구인가. 의심 없는 확신이 가장 치명적인 적이라면, 의심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영화는 로렌스의 연설 이후 의심과 확신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관객은 의심의 무게에 대해 극의 마지막까지 숙고할 기회를 얻는다.
세상의 확신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
“이건 콘클라베입니다. 전쟁이 아니에요.”
“전쟁입니다! 단장님도 한쪽 편에 서셔야 하고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 짐승들과 싸울 전쟁을 이끌 지도자입니다.”
“방금 전쟁이라 하셨는데, 그 의미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콘클라베를 전쟁으로 묘사하는 발언과 무슬림을 짐승이라고 일컫는 이의 과격한 표현은 전쟁의 본질을 묻는 ‘베니테즈’ 추기경의 질문으로 정리된다. 선대 교황이 사망 직전 비밀리에 임명한 아프가니스탄의 추기경인 그는 그 이유로 자격을 의심받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영화의 주변부에서만 간간이 모습을 비췄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다른 추기경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베니테즈에게 전쟁이란, 권력과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계속되는 편 가르기와 증오의 씨앗을 키우는 각자의 마음을 극복해내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익과 분노로 인한 차별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극은 마침내 과반수의 표를 받아 당선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베니테즈임을 반전 요소로 꼽는다. 다른 추기경들에 비해 딱히 이렇다 할 행동이 없었던 것과 명단에 없었던 인물이라는 이유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였지만, 가장 놀라운 반전은 그가 완전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성 정체성을 가진 것이라는 점이다.
여성조차도 가장 낮은 위치에서 목소리를 함부로 낼 수 없었던 교회가 그 범위 안에도 두지 않았던 이를 가장 성스러운 지위로 맞이하는 아이러니는 극의 흥미를 고조시킨다. 놀라 주저앉은 로렌스에게 베니테즈는 이 세상의 확신들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안다는 답을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내놓는다.
그의 대답 덕분에 로렌스가 말한 의심이란, 은연중에 자리 잡은 편견과 깊게 뿌리내린 고정관념을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경계해야 함을 관객은 깨닫는다. 관용의 적인 확신은 그 고정관념에 의심하지 않고 무의식 속의 편견이 잘못됐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베니테즈가 말한 전쟁의 의미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표를 행사한 것도 자신들의 발언과 그간의 행위에 대한 의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심으로 인해 믿음이 생겼고 그것은 교황의 자격에 대한 굳건한 확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의심이 있어야 확신이 생긴다.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기까지
무너진 건물 사이로 빛과 바람이 들어오며 영화의 마지막은 걸어가는 수녀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그 장면 이후에 비치는 로렌스의 표정도 한결 평온해 보인다. <콘클라베>의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을 아래와 같이 나타낸다.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부장제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 체제에 대해 의문을 던지죠. 거기에는 작은 균열이 생겨요. 그리고 그 균열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것이 살짝 비춰요.
저에게 그 세 명의 여성이 웃고, 미소를 지으며, 흰옷을 입고 걷는 모습은 앞으로 올 수 있는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듯했어요.
가장 낮은 위치에서 조용히 교회를 지켰던 수녀들과 성 정체성을 두고 갈등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바람을 불고 온 베니테즈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의문을 던지는 행위’를 인지한다. 체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구심을 가지는 행위는 마침내 새로운 변혁을 이뤄낼 수 있음을 영화는 시사한다. 신성한 교황 자리를 놓고 그토록 강조한 장소의 폐쇄성은 끝내 그 문을 열고 다양한 세상의 형태로 나아가야 비로소 완성된다.
교황직을 물려받은 베니테즈는 자신의 이름을 ‘인노첸시우스’라고 명한다. 'Innocent'에서 따온 이 뜻은 말 그대로 ‘순수한’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시 본래로 돌아가 가장 순수하고 정결한 상태에서 화합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와도 일맥상통한다.
아직 세상은 굳건히 닫혀 있는 곳이 많고 전쟁은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아니다. 갈등과 편견 속에서 혐오는 만연하고 그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의 모습도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폐쇄성을 타파하고 바깥세상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부조리함 속에서도 늘 본질을 잃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싹 틔울 수 있기를, 그 마음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의심할 수 있는 단단한 용기를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