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울타리에 야생성 강한 짐승을 가두고 기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유는 없지만 안락한 울타리에서 평생 순응해 길들여져 살거나, 길들여지지 않고 울타리를 탈출해 위험하지만 달콤한 자유를 누리거나. 탈출도, 순응도 택하지 않고 남은 삶을 거부한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1890년 희곡 <헤다 가블레르>의 주인공 ‘헤다’는 울타리에 갇혀 살길 거부하며 총을 들었다.
가블러 장군의 딸 헤다는 아름답고 도도하며, 우아하고 지적이다. 남자들에겐 꿈과 같지만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여자다. 냉정하고 이기적이며 질투 많은 헤다는, 권력을 휘두르고 타인을 통제하며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 빠져 있다. 하지만 남은 삶을 소심한 연구자의 아내로 살아야 하는 현실에 숨이 막힌다. 성공한 천재 작가이자 전 연인과 재회하는 헤다는, 학창 시절에 얕봤던 후배가 그의 성공을 도왔단 사실에 속이 뒤틀린다. 헤다의 숨겨진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판사는 그녀를 조종하고 억압한다. 보수적인 시대, 착한 아내와 순종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거부하는 헤다의 총구는 어디를 겨눌까.
2024년이 햄릿의 해였다면, 2025년은 헤다 가블러의 해다. 2025년 5월, LG아트센터와 국립극단에서 제목까지 같은 연극 <헤다 가블러>를 함께 개막했기 때문이다. 같은 희곡 원작 기반인 두 극은 배우 이영애와 이혜영을 캐스팅한 것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LG아트센터 개관 25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헤다 가블러>는 배우 이영애가 1993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개관작으로 출연했던 <짜장면> 이후 32년 만에 연극에 도전한 작품이다. 이영애의 출연만으로도 연극을 자주 접하지 않는 대중들의 이목까지 사로잡는 데 성공한 극은 1,335석 규모의 LG SIGNATURE 홀 대다수를 채우며 흥행 중이다.
2012년 후 13년 만에 돌아온 국립극단 <헤다 가블러>는 제5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 연기상·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을 거머쥔 작품이다. 헤다 테스만 역을 맡은 배우 이혜영의 연기로도 큰 화제가 됐지만 작품성도 탁월해, 재공연을 꾸준히 요청받은 명작이기도 하다. 극은 개막 전 배우의 건강 문제로 캐스팅이 교체되며(‘브라크’ 역이었던 배우 윤상화의 건강 문제로 해당 역엔 배우 홍선우가 출연하고 있다), 개막이 미뤄지는 난항을 겪었음에도 전 회차 전석 매진의 역사를 쓰고 있다.
두 작품을 제작·출연하는 관계자들에게는 서로가 자극되겠지만,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으로선 행복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여자 햄릿’이라 불리는 ‘헤다 가블러’를 이영애와 이혜영이라는 두 대배우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볼 수 있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이영애, 이혜영 모두 드라마, 영화 등 영상 매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배우들이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두 극 모두 화려한 캐스팅을 내세우기만 한 작품은 아니다.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뿐 아니라 무대·연출·의상·동일한 원작과 캐릭터를 재해석하는 방식까지 각자만의 치열한 고민이 담겼기 때문이다. 왜 우린 지금 두 명의 ‘헤다’를 만나야 할까.
강렬한 보랏빛 광기와 눈에 보이는 공포 – 이영애·전인철의 <헤다 가블러>
LG아트센터 개관 25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극은 제54회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수상한 전인철이 연출한다. 2006년 <고요>로 데뷔한 전인철은 <목란언니>, <노란봉투>, <나는 살인자입니다> 등의 작품으로 연극계의 주목을 받았다. 극은 영국 올리비에상 베스트 연출상·베스트 리바이벌상을 수상한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으로 공연되고 있다. LG아트센터 서울에서 5월 7일에 개막한 극은 6월 8일에 막을 내린다. 헤다 역엔 이영애, 조지 테스만은 김정호, 브라크는 지현준, 에일레트 뢰브보그는 이승주, 테아 엘브스테드엔 백지원, 줄리아나 테스만은 이정미, 베르트엔 조어진이 출연한다.
극을 대표하는 색은 보라색이다. 헤다의 의상을 비롯하여 극에서 언급되는 디오니소스의 포도 넝쿨 또한 보라색이다.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광기와 불, 축제를 상징한다. 축제는 헤다의 남편인 테스만, 헤다를 통제하는 판사 브라크, 전 연인이자 작가인 에일레트가 참석했던 파티를 뜻하기도 한다. 희곡에서부터 에일레트는 디오니소스와 동일시된다. 에일레트는 헤다가 판 함정에 빠져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고, 그로 인해 비극의 방아쇠가 당겨진다.
극은 디오니소스와 포도 넝쿨을 원작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갤러리가 연상되는 무대엔 포도 넝쿨을 쓴 디오니소스 초상화 액자를 배치했다. 전신 거울로 대체되기도 하는 해당 그림은 에일레트와 헤다를 암시한다. 보랏빛 옷을 입은 헤다가 보라색 포도 넝쿨을 쓰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극은 원작에서 에일레트만 가리켰던 디오니소스를 주인공 헤다에게까지 확장해, 광기와 불이란 이미지 또한 덧입혔다. 포도 넝쿨 모양의 대형 풍선을 헤다를 비롯한 인물들이 끌고 다니며 터질 것 같은 스트레스와 광기를 표현할 때 활용하기도 한다.
인물들은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도 무대 벽 앞 의자에 앉아 있다. 이는 권태에 질식해가는 헤다를 다각도로 지켜보며 압박하는 연출이다. 또한 가정부 베르트를 연기하는 조어진은 헤다의 주요 장면마다 카메라로 헤다 역의 이영애를 촬영하고, 그 영상은 무대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투사된다. 카메라에 더 능숙한, 32년 만에 무대에 선 주연 배우를 고려한 듯한 연출이다. 물론 대극장이란 공간의 특성상 관객 또한 배려 대상에 포함됐다. 영상의 클로즈업과 같은 연출로 디테일한 표정 연기를 누구나 편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은 실시간 촬영과 송출이란 방식으로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모두 굵은 발자취를 남긴 배우 이영애의 섬세하고 강렬한 연기력을 적극 활용했다. 포도 넝쿨을 쓴 헤다가 질투와 욕망을 분출하는 장면, 전 연인 에일레트의 원고를 태우며 광기에 휩싸이는 장면은 대형 스크린에 송출되며 헤다의 디테일한 감정을 모든 관객에게 공평하게 보여줬다. 영상 활용, 퇴장 없이 배우들이 무대에 계속 등장해 있는 건 여타 연극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연출이다. 따라서 새롭진 않지만 극의 분위기와 주연 배우의 특성·장점을 현명하게 활용한 방식이다.
에일레트가 권총 사고로 세상을 떠났단 소식을 전하는 브라크 판사는 헤다를 가질 목적으로 그녀를 통제한다. 에일레트의 권총은 헤다가 준 것이었기에, 브라크는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헤다가 순순히 복종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헤다는 총구를 자신에게 겨눠 브라크, 스캔들, 여성·아내로서의 순종과 의무를 요구하던 당시 사회로부터 보란 듯이 벗어난다. 극은 엔딩 장면에서 무대 벽을 위로 올려 공간감을 폭넓게 확장한다. 엔딩 무대 연출은 헤다의 해방과 그녀를 가둔 울타리로부터의 탈출을 뜻한다. 극 내내 갤러리 같은 거실에 산 채로 박제된 가장 비싼 전시품처럼 전시돼 있던 헤다는 아름다운 죽음과 함께 자유를 얻는다.
무채색의 우아한 파괴와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 – 이혜영·박정희의 <헤다 가블러>
13년 만에 돌아온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는 국립극단 단장이자 예술감독인 박정희가 연출했다. 2001년 극단 ‘풍경’을 창단하고 연극 <하녀들>,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등의 작품을 연출해 온 박정희는 2008년 <첼로>로 서울연극제 연출상을 받기도 했다. 극은 조태준이 번역하고 황정은이 윤색한 원작 각색본을 사용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5월 16일에 개막한 극은 6월 1일까지 공연한다. 헤다 테스만 역은 이혜영, 율리아네 테스만 역엔 고수희, 엘브스테 부인엔 송인성, 예르겐 테스만엔 김명기, 에일레르트 뢰브보르그 역엔 김은우, 브라크 역엔 홍선우, 베르테 역엔 박은호가 캐스팅됐다. 작품은 6월 7일부터 8일까지 고양어울림누리, 6월 14일부터 15일까지 당진문예의전당에서도 공연된다.
극을 대표하는 색은 화이트와 블랙, 즉 무채색에 가깝다. 소파·계단·테이블·의자·진열장·스피커 등 세트와 소품들을 비롯 인물들의 의상도 차분한 무채색 계열이다. 천장 중앙엔 이탈리아 로마 판테온 신전의 천창 ‘오큘러스(oculus : 천장의 원형 개구부)’를 연상시키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헤다가 원고를 불태울 때도 연기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연출로도 활용된다. 크기와 형태는 다르지만, 천장의 둥근 구멍은 LG아트센터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이영애의 헤다는 갤러리에 전시된 가장 비싼 살아있는 박제품 같았다면, 이혜영의 헤다는 유리 수납장에 갇힌 고급스러운 보석과 같다. 누구나 거리낌 없이 쳐다보고, 탐내고, 아름답지만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기 때문이다. 국립극단의 헤다는 한쪽 면이 불투명한 거실 유리창을 통해 다른 인물들에게 관음 당한다. 그들이 불투명한 창 너머를 지나다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헤다의 압박감과 질식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전 연인의 원고를 불태우는 장면, 브라크의 통제를 거부한 헤다가 자신을 스스로 쏘는 장면은 LG아트센터·국립극단 모두 강렬하게 연기하고 연출한 임팩트 있는 장면이다. 두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는지에 따라 극의 톤이 결정되기도 한다. (국립극단의 브라크는 원작과 LG아트센터 극처럼 판사가 아닌 검사다. 조만수 드라마투르그에 따르면, 브라크가 사건을 파헤치고 수사에 관여하며 헤다를 압박하는 방식이 검사에 더 적합해 직업을 바꿨다고 밝혔다.)
배우 이혜영은 에일레르트의 원고 더미를 아이처럼 끌어안고, 한 장씩 불태우며 슈베르트의 자장가를 부른다. 임신한 것으로 암시되지만, 아이와 모성을 거부하는 헤다는 원고를 아이 다루듯 하면서도 불길로 던지며 파괴해 버린다. 그녀가 불태우는 건 원고 자체, 에일레르트의 인생, 자신의 삶, 뱃속의 아이, 스스로를 쏴 억압에서 벗어나는 결말까지 뜻한다.
이혜영의 헤다는 원고를 태울 때도, 목숨을 끊을 때도 춤을 추듯 우아하다. 또한 철저히 혼자다. 원고가 소멸했단 걸 안 남편 테스만과 에일레르트의 집필에 도움을 줬던 엘브스테 부인(테아)은 함께 원고 복원에 몰두한다. 전 연인이었던 에일레르트의 곁을 테아가 차지한 것처럼, 그녀는 또다시 테스만의 정신적·지적 파트너가 되며 헤다를 고립시킨다. 당대 여성들은 경력과 학문으로는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테아는 원고 집필에 기여했지만, 헤다는 에일레르트의 뮤즈가 되는 것 외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브라크 검사는 헤다를 여성으로서 굴복시키기 위해 그녀를 협박한다. 엔딩 장면에선 모든 상황이 목소리로만 들려오고, 무대에 홀로 남은 헤다를 향해 목소리가 쏟아지다가 그녀가 생을 마치는 장면을 보여준다. 1막 시작 전 암전 상태에서 들렸던 총소리가 엔딩에서 발사되는 총소리인 것이다. 인간적이며 담백했던 이혜영의 헤다는, 타인을 파괴하고 자신을 소멸시킬 때조차 나비처럼 우아했다.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은 2012년의 헤다는 ‘신이 되려고 했던 여자’, 2025년의 헤다는 ‘아름다움의 본질에 머물고자 하는 존재’로 표현했다고 밝혔다. 배우 이혜영 또한 폭발적이었던 지난 시즌과 달리, 이번 시즌엔 인간적인 헤다를 연기했다.)
LG아트센터와 국립극단은 인물들의 이름을 쓰는 방식도 다르다. 국립극단의 헤다는 아버지의 성을 딴 헤다 가블러가 아닌, 결혼한 지 반년 된 남편 테스만의 성을 딴 헤다 테스만이다. 가블러의 딸이든, 테스만의 아내든 헤다는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헤다는 이름만으로도 대단한 장군의 딸, 교수가 될 학자·연구자의 아내, 테스만 가문 구성원, 어머니, 혹은 약점을 잡힌 여자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내, 가족, 어머니, 여자가 되길 거부했고 자신으로만 살아있겠다 침묵 속에서 절규하며 삶을 끝냈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아버지 가블러 장군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 됐을 수도 있고, 브라크보다 더한 욕망과 통제 욕구를 드러냈을 파괴적인 육식 동물 같은 헤다. 꿈은 고사하고 누군가의 여자로 존재해야만 했던, 샤프롱(chaperon : 사교계에 나가는 젊은 여성의 보호자) 없이 외출조차 힘든 여성의 몸에 갇힌 헤다는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란 감옥의 죄수가 되길 거부했다.
브라크는 스스로를 쏜 헤다에게 ‘인간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냐’며 경악한다. 하지만 그녀는 지루하지 않은 삶을 향한 열망으로 들끓는 인간이었다. 헤다는 죽은 듯 사는 삶 대신 살아있는 죽음을 선택하며 관객에게 총소리보다 더 폭발적인 경종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