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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산울림의 노래들로 구성해 본
가상의 하루입니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네. 하루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알람이 요란하게 울어댄다. 몇 시간 못 잤는데, 정신은 맑지만 왠지 일어나기가 억울하다. 좀 더 눈을 붙여본다. 5분 뒤에 다시 알람이 울린다. 그렇게 열댓 번을 반복한 뒤 겨우 몸을 일으킨다. 정신없이 씻고 나오면 방이 너무 고요한 듯 느껴진다. 음악을 틀고 나갈 채비를 마저 한다.
점점 흥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늘 있을 일들을 상상한다. 누굴 만나 어떤 얘길 할까? 상상이 배춧잎처럼 푸른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다.
어렸을 때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엄마는 아침에는 무섭고 저녁에는 착하다고. 엄마가 아침에도 저녁때의 엄마면 좋겠다고. 우리를 깨우고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지각도 결석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엄마의 아침은 바빴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나서는 길에 이때를 어렴풋이 그려본다. 이제 스스로가 무서워야 하는 아침이지만, 나는 의젓해지기는 한참 멀은 것 같다. 매일 시간에 딱 맞춰 일어나서 허겁지겁 준비를 하고, 아침은 당연히 거른다. 꼭 하나씩은 뭘 잊거나 잃어버리고, 늘 똑같은 일상에도 꼬박꼬박 ‘하기 싫다’, ’가기 싫다‘ 엄살을 부린다. 그러다가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또 다 까먹고 헤실헤실 웃는 나다.
아침은 그런 시간이다. 전날이 어땠든 새롭게 태어나는 기회이다. 마치 목숨이 무한대인 게임처럼, 눈을 뜨고 일어나서, 방문을 나서고, 세상에 인사한다. 문밖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르기에,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버릴까 마음껏 공상한다.
어느 젊은 거리에서 연인을 만난다. 복잡한 사람들 틈에서, 날이 더워도 손을 잡는다. 한순간에 관찰자에서 주체가 된다. 온누리를 둘러보던 눈앞에 한 명의 사람이 놓인다.
아직 난 너무 어려서,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고 다룰 줄도 모른다. 그저 커다란 감정들이 울컥 다가오고, 알 듯 말 듯한 순간들이 발에 챌 뿐이다. 사랑은 내게 자주 수치스럽다. 이제 나름은 안다고 생각했던 삶의 면면들이 사랑 앞에서 회춘한다. 나는 너무나 어린애가 된다.
거리에서, 식당에서, 카페에서, 호숫가에서, 해변에서 그와 나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햇살이 스쳐가는 어수룩한 얼굴들이 무엇을 말했던가? 오가는 눈동자 뒤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다.
사랑의 묘연한 순간들은 세상만사에 알려야 할까? 알릴 수 있을까?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깊숙한 옷장 이불 틈으로 숨겨두어야 할까? 그보다도 멀리, 나조차도 잊도록, 뽀얀 숲속 나무 밑동에 묻어두고 싶다. 한동안 극진한 정성을 들여 물도 주고 지켜주고 싶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핀 꽃을 아주 예뻐해주고 싶다. 자꾸 찾아가서 돌봐주고 싶다.
그러다 나중에 불현듯 떠오르면 소름이 끼칠 만큼 까맣게 잊고 있더래도, 이미 무럭무럭 자라서 알아보지도 못하는 나의 일부가 되어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건 머나먼 얘기일 테다. 지금은 조금만 더, 더, 더
헤어진다. 이별은 짧거나 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가 온다. 조금 더 같이 있을 걸 그랬나, 아니면 더 일찍 돌아와야 했나. 눈앞에 놓였던 한 겹의 세상이 걷어지고 홀로 걷는다. 둘의 길과 혼자의 길은 이다지도 다르다. 속삭였던 바람은 고함치고, 온화하던 해는 온데간데없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이별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으니 애석하다. 원래가 만물이 피고 지는 꽃잎처럼 왔다가 떠나는 것이라는데,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나의 이 허전함은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이별은 긴 눈물이 되어 두고두고 내린다.
긴 여행을 다녀온 듯 지친 몸과 마음을 방 한켠에 누인다. 고요 속으로 침잠한다. 그 많던 활기와 광채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밤이 모두 집어삼켜 버리는 걸까? 잡히지 않는 의문과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찾아온다.
공허함을 못 이겨 이것저것 들춰본다. 괜히 냉장고를 열어보고, 서랍 속을 뒤적거려보고, 인터넷을 타고 들어가 손가락만 겨우 꼼지락거려 본다. 결국 다 무용하여 한숨을 푹 쉰다.
가끔 이렇게 뜬구름 같은 우울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은 질문들을 하곤 한다.
모든 걸 휩쓸고 가버리는 시간이 원망스럽다.
이렇게 시간이라는 게 경외로워질 때면, 일기장을 펼친다. 냇물에 손을 넣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리 막아보려해도 손 사이로, 옆으로 - 물은 아랑곳 않고 흘러간다. 그래도 최소한의 저항은 줘보려고, 그런 의미에서 기록을 남긴다. 오늘 하루의 이야기, 요즈음 느끼는 것들의 이야기, 머나먼 세상의 이야기. 남겨진 글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무 답도 얻을 수 없지만 않지만 조금은 후련한 듯하다.
차가운 밤을 뚫고 다시 해가 솟았다. 아침이슬이 안개 속에 핀 꽃잎에 아롱지고, 산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는 소리 – 아침이다. 깊은 밤에 흰 종이에 가득 번지던 생각이, 쪽을 넘겨 텅 비어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을까? 그건 잘 몰라도, 확실한 건 아름다운 추억이 몸 어딘가에 배어있다.
그러니 오늘 아침도 다시 즐거운 날을 기대할 수 있다.
창밖이 유난히 쾌청하다. 어제 비가 아주 오더니, 날이 개었나 보다. 산울림의 ‘무지개’를 듣는다. 이렇게 또렷한 희망이 언제든지 내 곁에 있다니. 아름다운 세상이다! 풍요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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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창완밴드 콘서트 - 안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