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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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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은 차가운가, 뜨거운가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될까? 물이 되는 걸까. 봄이 오는 걸까. 사람은 너무 차가운 것을 만지면 화상을 입는다. 이상하다. 너무 차가운 걸 만지면 뜨겁다고 느낀다. 차가운 건 일종의 뜨거운 게 아닐까. 그렇다면, 얼음은 뜨거운 걸까 차가운 걸까. 그것은 깨져야만 하고, 녹아야만 하는 무의미한 답보 상태에 불과할까.

 

 

 

경계와 부유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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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첸 감독의 <브레이킹 아이스>는 “삶에 갇혀 있거나 표류 중인 청춘들”이 얼음처럼 굳어버린 삶에서 물이 되어 유영할 수 있음을 희망적으로 그린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부상으로 꿈을 접고 연길에서 가이드 일을 하던 나나는 다시 스케이트화를 꺼낸다. 우울증을 겪는 하오펑은 얼음에 기대어 눈물을 쏟아내고 멈춰버린 시계를 풀어낸다. 샤오는 더는 누워있길 거부하며, 연길을 떠난다.


연변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북한과 중국 사이 문화가 공존하는 ‘경계적 공간’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인 하오펑은 여행자며, 나나는 꿈을 포기하고 생계를 이어가고, 샤오는 아무런 흥미도 꿈도 없이 연길에 온다. 이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존재들이다. 붕 떠 있는 듯한 이들의 부유감은 도로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경계 위에서 표류하는 이들의 삶은, 한국어 대사의 갑작스러운 등장이나 뒤섞인 한국의 문화는 관객에게도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하며 불안한 청춘들의 감정선에 자연스럽게 이입하게 만든다.


이방인처럼 유리된 청춘의 모습을 얼음에 비유한 점은 눈에 띈다. 청춘을 생기 넘치는 푸릇한 색감에 비유하는 기성의 논리와는 다른 시선이다. 또한 조선족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한국의 기성 영화들이 보여주는 고정관념이나 혐오의 시선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는 한국이라는 사회가 조선족, 고려인을 타자로 정체화하는 방식과 맞물려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 감독은 한국에서의 작품 발표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브레이킹’인가 ‘멈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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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니 첸은 “이전 세대와 정부, 사회에 실망하며 느끼고 있는 집단적 우울증”을 포착하려 했다. 이는 팬데믹 기간 영화 제작이 지연되는 위기 속에서 동시대의 청춘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는 청춘들의 집단적 우울증은 드러나지만, 그 구조적 원인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술에 잔뜩 취하고, 물건을 훔치는 장난을 치기도 하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이어가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려고 발을 미끄러트려도 보지만, 정작 그들을 그렇게 몰고 간 사회 구조적 문제는 은폐되어 보이지 않는다.


감독이 말한 “물은 낮은 온도에서 얼음이 되지만 얼음을 꺼내 수면 위에 올려놓으면 순식간에 녹기 시작하고 다시 물로 돌아간다”는 은유를 따른다면, 우리는 얼음을 깨는 것(‘브레이킹’)보다는 ‘녹아내림’에 더 집중해야 할 필요가 보인다. 얼음을 깨는 행위, ‘브레이킹 아이스’는 얼음을 깨트려야 할 상태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과연 멈춰 있고 단단한 얼음 상태는 극복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자체로도 삶의 방식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영화는 얼어붙은 상태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며, 그 자체가 저항이자 자유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얼음은 흐르지 않는 대신 버티고 단단히 살아내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청춘의 유영보다도, 멈춰 있던 답보의 순간들이, 방황의 모습들이 더 진실하게 와닿는다.

 

 

 

신화적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


 

영화 속 청춘들의 방황은 단지 현실적 공간에 머물지 않고, 신화적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작품 속에는 단군 신화가 등장한다. 정확히는 호랑이와 웅녀에 대한 이야기다. 백두산의 천지를 보고 싶다던 하오펑의 말에 세 사람은 백두산을 오르고, 가는 길에 그들은 백두산에 얽힌 전설을 이야기한다. 동굴에서 지난한 세월을 견뎌 여자가 된 웅녀의 서사는, 잠든 나나의 얼굴을 비추는 카메라와 맞물리며 중첩된다. 이후 눈보라로 천지에 도착하지 못한 그들은 곰을 만나고, 곰은 나나의 다친 발목 주변을 배회한 후 떠난다. 이 장면은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 치유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 관객의 시선에서는 이것이 곧바로 치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동북공정으로 인해 엉켜 있는 한중 관계, 조선족과 고려인을 타자화하는 한국 사회의 시선 속에서, ‘단군 신화’라는 명시 없는 전설의 삽입은 오히려 주요 의제를 회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백두산에 얽힌 전설’이라는 모호한 명명은 불충분하다. 물론 신화를 민족적 맥락을 넘어 보편적 회복의 상상력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정치적 맥락을 배제한 신화의 등장은 치유보다는 회피로 느껴질 가능성도 있다.

 

 

 

반드시 흘러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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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영화는 얼음처럼 굳어버린 청춘들의 삶을 그려내며, 녹아내림과 깨트림 사이 어딘가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닿는 곳은 관객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춘은 반드시 물이 되어 흘러야만 할까? 흐르는 상태는 반드시 긍정되며 지향되어야 할 상태일까? 삶의 위기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있는 것, 동시에 단단하게 살아내는 것, 버티는 것 (얼음 상태) 역시도 삶의 한 방식일 수 있다. 영화는 ‘유영’을 희망처럼 보여주지만 관객의 입장에 따라 오히려 멈춰 있는 얼음 상태야말로 더 절절하게 다가올 수 있다. 영화 속 세 인물이 흘러가기 시작하는 모습보다, 그들이 얼어붙어 있던 순간의 체온과 방황이 더 강렬하게 전해지는 이유다. 그렇기에 <브레이킹 아이스>는 청춘의 다양한 얼굴을 비추는 작품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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