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쏘아올리는 [사람]
-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쏘아 올리는 불꽃
2023년 8월 14일
나는 유약하고 심약한 걸까. 약한 내가 밉고, 사회가 무서워. 버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나는 쇠가 아닌데, 내리치며 단단해지고 싶지가 않아. 너무 아파. 약함은 정말, 나쁜 속성인 걸까? 나를 죽이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나?
누군가가 말했다. “다음 해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그래도 늦지 않았다고. 망쳐버린 건 뒤로 하고.” 그때 그것은 응원이었지만, 나에게는 달리 들렸다. 그에게 내 2024년은 망쳐버린 해구나. 버리는 해처럼 느껴졌구나.
2024년은 낙차가 심한 해였다. 행복과 불행의 낙차에 나는 속절없이 떨어지고 부서지고 날아오르고 다시 산산조각 났다. 그 해는 불행한 해가 아니었고 망친 해도 아니었으나,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해는 정말이지, 나쁜 해도 아니었다. 나는 새로 시작하려고 온갖 힘을 내고 있었고 삶을 바투 쥐었다. 나는 2024년만큼 삶을, 엄마의 손가락을 움켜쥐는 아기처럼 안간힘을 써서 쥐어본 적이 없었다. 스무 살, 성인이 되고부터 주어진 어른의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를 쉽게 내버렸던 내가 2024년에는 정말이지 살고 싶어 했다.
“엉망진창이래두 너는 늘 삶을 향하잖아?”
친구의 말 한마디에, 수없이 밀려드는 물건을 에어캡으로 둘둘 싸고 포장해서 레일에 올리다, 몸이 퍽 무너졌다. 20분이라도 앉아 있어 보고 싶다고 무릎이 플라스틱 인형의 다리처럼 굳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나는 삶이 너무나 움켜쥐고 싶었다.
2024년 1월 21일
어쩌면 나는 나아지고 싶은 걸지도 몰라. 그리하고 싶은 걸지도 몰라. 그렇잖아. 어느 날은 삶을 강하게 바투 움켜쥐고 싶잖아. 그게 삶이 아닐까. 가끔은 살고 싶고 가끔은 내일을 완벽히 꾸려보고 싶고, 가끔은 그만두거나 쉬고 싶은 거.
2024년, 그 해만큼, ‘언젠가’를 빌고 믿어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행복해질 거야’라는 말을 주문처럼 읽고 외우고 노래했다. ‘언젠가’는 도대체 언제 와? 수도 없이 꺾였다. 나는 언젠가가 너무 멀어서, 언젠가가 언제든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좋아하던 글쓰기도 독서도 너무 어려워졌다.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여백이, 여유가 내 안에 없었다. 그때 나는 나도 모르게 예전에 쓰던 다이어리를 찾아왔다. 짐이 많은 와중에 다이어리를 바지 주머니에라도 쑤셔 넣으려고 애썼다.
거기엔 그런 말들이 있었다. 과거의 내가 깨달은 것들, 다잡은 마음들, 미래의, 지금의 나는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마음들이. 그때 나는 이미 다 자랐지만 더 자라고 싶어했다. 끝없이 목말라하는 여름 뙤약볕 아래 어린나무처럼 더 물이 마시고 싶었고 팔을 좀 더 뻗어 햇살의 가느다란 가닥을 모두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2024년 3월 4일
그래도 삶이 계속된다는 게 슬플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는 거 같아. 그래도 나를 잘 꾸려나가고 싶다는 마음은 따뜻한 실타래 삼아 쥐고 벽을 더듬어 나가볼래. 실이 끝내 빠져나가 버릴 때도 있겠지만, 그때는 손금을 실이 지나간 자리로 삼아 새로운 나를 믿고 다시 걸어 나가볼래.
난 그냥 이렇게 태어난 거야. 내가 아픈데 이게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거겠어.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어. 단단하지 않음을 나무라지 말자. 무른 것들이 서로를 안아주며, 그렇게 나아가자
*
2024년 11월 2일
생각보다, 해보면 그렇게 무서운 일이 아닌 것도 있어.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 조금만 더 나아가보자. 그래보자. 약한 것은, 그냥 그렇게 태어난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줘야 하는 거야. 약하고 무른 것은 그저 다독이듯 만져주고 어루만져주고 그러면 되는 거야.
이미 내가 알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는 일은 생각보다 신기했고 슬펐다. 나는 이제 이것들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길을 걷다 문득 가게에 들어섰다. 다이어리 하나가 사고 싶었다. 커피 한 잔 마시기 힘들었으므로, 컵라면으로 매일 한 끼 이상을 때웠을 때이므로, 천 원 남짓한 다이어리면 과분했다.
문득 산 다이어리와 가방 밑바닥에서 방치된 볼펜. 나는 그곳에 공과금과 월세 날짜를 먼저 적었는데, 문득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책상이 없어 식탁을 책상 삼아 걸터앉아 내일을 계획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오늘을 돌아보는 일이, 커피도 차도 없지만 물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일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나는 너무 황홀했다. 더없이.
기록한다는 것은
쓴다는 것, 기록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주로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음. 또는 그런 글.’이다.
하지만 내가 하는 기록은 표준국어대사전의 뜻과는 다른 기록이다.
나는 내일을 계획하고 오늘을 다시 돌아보며, 어제의 마음가짐을 이어 오늘과 내일을 다시 꾸린다.
기록하는 것, 쓰는 행위란 내 생각과 마음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고민과 걱정을 눈에 보이게 적어냄으로써 앞으로의 길에 대해 더 쉽게 고민할 수 있도록 한다.
일기 쓰기, 기록하는 행위란 나에게 미래를 전제하는 일이다. 글쓰기란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전하는 편지이자, 쏘아 올리는 어떤 불꽃에 가깝다. 또한 미래를 향해, 되고 싶은 나를 향해 쓰기 때문에 글쓰기란 일종의 기도다. 다시 말해, 글쓰기란 희망을 향해 달리는 일이다. 나 외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을 내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만큼 내 삶이 남겨놓고 계획하여 꾸려나갈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고통과 수치심을 드러내는 여자들을 존경해. 그들의 글은 날 울게 하고 그 울음은 또 몇 달을 살게 하니까. 살기 위해서 일기를 쓴다는 말에 공감하지만, 나는 매년 쓴 일기를 공들여 태웠어.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 글들만 내 자리에 남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 윤지영, <호로피다오>, 2024 中
분명히 있었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가. 그러나 나는 글쓰기의 가치는 그의 사전적 정의인 남김보다, 기도에 있다고 믿는다. 희망을 품는 일. 더 나아지려는 마음. 그런 마음을 품고 적어내려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어떻게 쓸까?
써 내려가는 것은 자유다. 어떻게 쓰든, 누군가의 형식을 빌리든, 하얀 무지, 방안지, 혹은 형식이 정해진 줄 노트에 쓰든 간에.
비워진 하얀 공백은 무엇이든 담길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기에 사람을 설레게 하지만 동시에 두렵게 만들기도 한다. 무엇이든 담길 수 있기 때문에, 실패 역시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형식과 아름다움에 집중하여 글을 썼던 적도 많지만, 결국 나는 그 모든 일이, 막 휘갈겨 쓸 필요도, 형식상의 미에 집중하며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쓴다는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노트북으로도 글을 쓰고, 휴대전화로도, 손으로도 쓰지만 가장 좋아하는 방법은 손으로 쓰는 일이다.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로 글을 쓸 때는 쓰는 과정, 즉 펜촉이 하얀 종이 표면을 긁으며 글이 적히는 과정을 볼 수 없다. 노트북이나 휴대전화는 자판을 누르면 곧장 입력되어 화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빠르게 떠오르는 의식의 흐름을 털어놓기 좋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큰 고민이 있거나 소화하기 힘든 감정은 노트북으로 휘갈겨 쓰고 문서를 삭제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다시 직면해야 할 필요가 있거나 다시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 펜을 잡고 다이어리에 글을 써내려간다. 손으로 쓰는 행위는 반드시 몸과 정신이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에, 몸에 들어가는 부담 탓에 좀 더 정갈하고 다듬어진 문장이 나온다. 글의 흐름을 보기에도 손으로 쓰는 게 좋다.
나는 손으로 메모하고 보통 컴퓨터를 활용해 그것을 백업하거나 줄글로 구체화하는 편이다.
쓰면서 살아가길,
글쓰기란 결국, 나를 더 깊이 용인하는 일이다. 그것은 과거의 내가 나에게로 쏘아 올리는 어떤 불꽃 같은 거라서, 나를 살게 한다.
나는 요즘 예전에 쓴 일기를 들춰보며, 그에 답글을 달 듯 오늘의 일기를 적는다. 그럴 때면, 예전에 알던 것을 지금은 잊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주눅이 든 과거의 나에게 (여전히 내 안에 숨어 있을 그에게) 지금은 해답을 찾아 전해줄 수 있다. 분명히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기 때문에 전달할 순 없겠지만, 과거의 내가 쏘아 올린 신호탄에 현재의 내가 답하는 과정이 의미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곧 미래의 나에게 전해질 글이겠지.
쓰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당신이 쓰면서, 살아남고, 살아남아 쓰고, 결국엔 살아‘가’면 좋겠다.
[박하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