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력을 거스르는 마음의 힘 - 윤지영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4' [미술/전시]

윤지영 작가의 작품을 보고
글 입력 2024.11.2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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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을 거슬러 (Defying Gravity) (뮤지컬, <위키드> 中)


 

"널 증명해 봐!"

 

오즈의 마법사가 말한다. 엘파바는 마법서 '그리머리'를 들고 공중 부양 마법에 성공한다. 그 결과 마법사의 원숭이들은 날개를 갖게 되고, 마법사는 탄성을 지른다. "훌륭한 스파이로 쓸 수 있겠어요." 엘파바는 오즈의 마법사가 마법을 부릴 줄 모르는 사람이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동물을 차별하고 탄압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그리머리를 들고 도망치고, 마법사와 같은 편이었던—엘파바의 재능을 유일하게 인정하던 엘파바의 마법학 교수—마담 모리블이 엘파바를 사악한 마녀로 선동하며 그를 쫓는다.

 

탑 꼭대기, 엘파바는 더는 도망칠 곳이 없고, 빗자루에 마법을 걸어 날아오른다.

 

 

글린다

엘피, 내 말 잘 들어, 그냥 잘못했다고 해!

더 늦기 전에

마법사님께 돌아가

간절히 원했잖아

평생 동안, 기다렸잖아!

 

엘파바

알아.

하지만 이제……

원치 않아, 아니

돌아갈 수 없어, 난

뭔가가 달라졌어

내 안의 무언가

이제는 의미 없어

남들이 정한 규칙들

난 깨어나 버렸어

돌아가긴 늦었어

내 직감을 따를래

눈을 꼭 감고

 

날아올라, 중력을 벗어나

하늘 높이 날개를 펼 거야

날 막을 순 없어

 

 

엘파바는, 두려웠을 것이다. 글린다는 말한다. "엘피, 너 떨고 있어……." 글린다는 엘파바에게 망토를 입혀준다. 엘파바는 두렵다. 그간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다. 날아오른 순간에도 약간 불안정했다. 분명 불안했을 것이다. 지금껏 믿고 있던 세계가 박살 났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곁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꿈도, 희망도, 동경도, 믿고 있고 존경하던 사람도 모두 사라졌다. 선한 사람이라 믿어왔던 것들, 옳다 믿어온 세계가 모두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엘파바는 마법 능력이 뛰어난 자신보다 오즈의 마법사를 믿었다.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면, 이 녹색 피부를 바꾸고 싶다고 소망했다.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고, 엘파바는 그 소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위험에 처한 동물들을 도와주세요."

 

위대하다 믿어왔던 것들이 모두 부서지고, 남은 건 어딘가 이상하고 두려운 마법 책 하나와 빗자루 뿐이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뿐. 글린다와는 이제 헤어져야 한다.

 

엘파바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지배자들, 녹색 피부를 가진 자신을 향한 경멸, 자랑스러운 딸과 언니, 그 모든 '중력'을 거스르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을 믿고, 끝내 부정하던 자신의 능력을, 생각을 믿고 날아오른다.

 

날아, 오른다, 중력을 거슬러.

 

 

 

2024 올해의 작가,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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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를 찾았다. 소개하는 네 명의 작가 중, 처음 작품은 윤지영의 작품이었다. 다소 조도가 낮은 전시실로 들어가자마자 내 앞을 조형물이 가로막았다. 내장처럼 질척한 이미지와 색감의 밧줄이 엮여있었다. 그것은 끝까지 다 짜이지 못한 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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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장을 꺼내 그물을 짓던 때가 있었다.> (윤지영, 2024)

 

 

불편했다. 불쾌했다. 안에 있어야 할 것이 바깥에 있을 때, 특히 내장이나 피 같은 것. 그런 것이 이 시대의 '정상성'에 맞지 않게 그렇게 바깥에 나와 있을 때 사람들은 불편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나 역시도 그랬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면의 문제는 곧 외부, 몸의 문제로, 피부, 살, 뼈를 지나 내장으로 이어진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내장을 꺼내 그물을 짓던 때가 있었다."


석고상을 보겠거니 하고 들어온 관람객은 잊고 있던 통각, 상상하지 못하는 통각, 동시에 어쩌면 자신도 겪었던 그 통각을 떠올리고 만다.


이 작품을 보자마자, 나는 숨을 멈췄다. 어떤 멍함의 순간, 벙찌는 순간, '뭐지' 내지는 소위 '미쳤다'의 말로 터무니없이 정리하고 치워버리는 복잡한 마음과 정동. 나는 윤지영의 작품을 보는 내내 내장 혹은 마음 그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어떤 마음을 뱉으려고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턱 근육이 아프도록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걸 단순히 '미쳤다' '대단하다' 정도의 말 따위로 치워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 감각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윤지영의 작업들


 

 

윤지영의 작업은 보통 사회적, 문화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묘한 불편감을 주는 무언가를 만났을 때 시작된다. 그는 개인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더 ‘나은’ 상태를 위한 ‘노력’에 관해 여러 작업을 만들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감춰져 있는 내면이나 내부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도 만들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로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봉헌물로서의 조각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소개 中

 

 

이 불편감을 주는 무언가는, 그 원인은 대개 감추어져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문제로 돌리며 은폐하는 구조적 문제들이라고 여겨졌다. 그것은 곧 중력이었고 개인이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함으로써 발생한 관성일 것이다.


윤지영의 작품 속 감추어진 부분들은 중요하지만, 바로 포착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고, 왜 무엇이 그것을 은폐하고 있는가, 작가는 왜 숨기고 있는가, 그러한 불편감을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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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다와 백조> (윤지영, 2013)


 

<레다와 백조>는 제우스가 백조로 변해 레다를 겁탈한 신화 속 이야기를 모티프로 가져왔다. 이 이야기는 미술사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되며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일조했다. 작가는 그 재현 방식을 전복하여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의 목을 레다의 손에 쥐어 준다. 그리고 그 부리를 백조의 성기에 물린다. 관심의 대상은 레다가 아니라 백조여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소개 中

 

 

다프네, 아폴론의 사랑을 피해 도망치다 나무가 된 여자. 아폴론은 그 나무를 잘라 자신의 상징으로 썼다.


나는 수많은 신화를 떠올렸다. 모두가 백조가 아니라, 레다와 다프네를 보았다. 그들은 시대에 맞게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나는 그 신화들이 오래도록 끔찍했다. 아무도 백조를 탓하지 않는 세상이, 모두가 레다를 바라보는 세상이. 그래서 나는 이 전복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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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몸: 틀 없는 몰드 그리고 하나-여러-얼굴>

(윤지영, 2021, 실리콘, 투명사, 연질 발포 우레탄 폼, 어떤 여자의 얼굴과 같은 부피일 수 있던 크기)

 

 

한 여성의 얼굴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덩어리가 있다. 이 덩어리에는 뼈가 없다.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어 어떤 고정된 형태로 유지할 뼈가. “작가는 이 조각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외부에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상상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틀의 통제를 벗어난 이 덩어리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그 얼굴은 누구의, 어떤 젠더의, 어떤 삶을 살아온, 어떤 생김새가 될 수 있는 얼굴인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말이 떠올랐다. 여성, 사실은 무엇이든 어떤 정체성과 성적 지향성이든 가질 수 있고, 어떤 존재도 될 수 있으며, 어떤 지위도 목적도 가질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억압한다. 여성의 얼굴을, ‘여성스러움’을 만들어 그를 가둔다. 그러나 안에 있는 그 덩어리는 정말이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내가 타인에게 반드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그저 나로서 존재한다. 누구에게 나를 반드시 증명할 필요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덩어리를 가둘 그 주형틀이나 뼈대 같은 바깥의 무엇이 없다면.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그 덩어리로서의 내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 그리하여 무엇을 근거로도 차별받거나 혐오 받지 않을 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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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뱉어내려면 일단 삼켜야하고> (윤지영, 2021)


 

본래 이 작품은 바닥에 놓인 채 모래가 가득 찬 상태로 전시되었다. 구 안으로 모래를 부으면 처음에는 구멍을 통해 빠져나온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주변으로 흘러나온 모래가 쌓이면서 깔대기 구멍을 막고, 모래는 구를 가득 채울 때까지 쌓이게 된다. 턱 끝까지 차오른 압박감이 한계를 넘어 터져나오듯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구는 바닥을 벗어나 천장에 매달려 있다. 높이의 변화로 인해 구 속의 모래는 모두 비워졌다. 삼켰던 것을 모두 뱉어 낸 마음의 무게는 조금쯤 가벼워졌을까?

 

국립현대미술관 소개 中

 

 

과연 가벼울까. 깔때기를 통해 우리가 외부와 관계한다면, 아무 모래도 채워지지 않고 아무것도 뱉어내지 않는 마음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처음엔 숨을 막는 압박감이 사라져 그 마음이 편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람 人이란, 한 사람에게 한 사람이 기대어 만들어진 글자이므로, 결국 이 마음은 끝내 편안하지도 살아남지도 못할 것 같았다. 살아남았다 한들, 그것은 살아’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깔때기가 막힐 만큼 차오르는 모래를 끝없이 감내하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용, 가장 어려운 그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를,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이 구 안에서 모래는 어떤 경로를 지나 어떤 구멍 밖으로 나올까. 그 모래가 과연 처음 들어간 것과 같을까. 그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빠져나온 이유는 무얼까. 그 모래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그 모래는 남김없이 내 마음에 어떤 부속물도 남기지 않을까. 결국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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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너, 하나, 얼굴> (윤지영, 2024)


 

소망하는 마음을 담은 조각이다. (…) 이 얼굴은 소원을 빌며 혹은 소원이 이루어진 데에 감사하며 바쳐졌다는 밀랍 봉헌물을 떠올리게 한다. 많은 경우 밀랍 봉헌물은 소망하는 대상을 닮도록 만들어졌다. (…) 좌대 안쪽에 놓인 밀랍 얼굴은 또 다른 무언가가 변형되어 만들어졌다. 작가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네 명의 친구들에게 작가에 대한, 또는 서로의 관계에 대한 마음을 표현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개 中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친구를 위한 네 사람의 마음이 들려온다. 그것은 찰카닥 찰칵, 거리는 사진기 셔터음을 닮기도 했다. 당신의 안녕을 묻는 누군가의 마음은, 마치 밀려오는 파도를 멈추는 사진기의 셔터음을 닮았다.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말했을까. 이 작품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또 안녕을 빌어주고 싶은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편지, 노래, 외침, 침묵, 시간 같이 말이 아닐 수도 있는 어떤 마음들은 하나의 밀랍 봉헌물로 만들어진다. 그 가능태, 어떤 마음이 무엇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고 전해질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은, 내가 중력을 거스르고 마는 엘파바를 떠올리게 했다. 마법 주문을 외워, 소망을 현실로 만들어 끝내 자신을 억누르는 불편감들,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른 엘파바. 이 마음은, 소원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밀랍 봉헌물이 되었듯이, 무엇이든지. 소원을 들어주는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소원을 비는 마음, 누군가를 위해 비는 마음에는 힘이 있어서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변하게 만드는 그런 마법.


물체의 관성은 외부의 힘으로 깨진다. 한때 나는 내 삶이 관성의 법칙처럼, 한번 잘못된 길로 가면 그대로 쭉 빠져야 한다는 생각에 잠겨 좀처럼 일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마음의 힘을 믿는다. 사람 내면에는 마음이 있어 결국 나를 억압하고 누르는 관성을 이겨낼 내부의 힘으로 이 관성을 깨트릴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든 깨트릴 거라고. 결국 나는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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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피다오> (윤지영, 2024)


 

네가 어떤 상태인지 말로 다 설명 못 해도 

문장들 사이 숨소리, 단어를 고민하는 시간, 말의 빠르기 등 만으로도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어. (…)

그래서 난 네가 죽을까 봐 무서웠어.

너무 무서워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어.


살아. (네 명의 목소리가 겹친다.)

 

<호로피다오>, 윤지영, 2024

 

 

‘호로피다오’는 걷는 것과 뛰는 것 사이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의 한 친구는 어떻게 뛰다 보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저 움직임은 뭔지 생각하면서 그렇게 뛴 적 있냐고 작가에게 묻는다. 그리고 보고 싶다고.


친구 네 명의 목소리는 밀랍 실린더에 담겨 녹여져 하나의 얼굴이 된다. 그것은 봉헌물이다.

 

미술관 속 작가의 예전 작품들은 끝내 부서지거나 틀어막히거나 완전히 파괴되곤 했다. 그러나 최근의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작품은 나를 강제하는 힘에 대한 진술로부터 나를 지탱하는 힘에 대한 증언으로 이행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4> 소개문

 

 

나는 이 작품에서 끝내 중력을 거슬러 오르는 소망의 힘을 만났다. 소망이, 그를 위한 기도들이 모여,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그를 지탱했다. 작가는 친구들의 맹세를 지켰다. 다시 말해, 살아남았고, 살아가는 중이다.

 

 


중력을 거슬러, 날아올라


 

자신에게 너무 불리하게 작용하는 세상의 질서, 그 중력,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 관습 그 모든 중력을 끝내 거슬러 날아오른다. 중력을 당장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중력에 맞서서 날 수도 있다.

 

그래서, 중력을 거슬러 날았다.


우리가 계속 살아가면 좋겠다. 중력이 관성이 우리를 계속 몰아넣더라도, 죽으라고 죽으라고 세상이 우리를 내몰아도, 끝내 서로를 우리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것은 신을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이 전시를 보고 더 마음을 굳혔다. 누군가를 안녕을 비는 기도에는 분명히 힘이 있다고. 그래서, 나는 살기를 바라며, 살라고 자꾸, 안녕하냐고 기도한다. 살아보자고, 그래서 결국 중력을 거슬러 날아보자고.


윤지영의 다음 작품이 한없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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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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