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 브래키에이션 [공연]

이것은 현재에 대한 이야기다.
글 입력 2024.12.2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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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성에 대한 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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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이미지의 배반>에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있다.

 

이것은 파이프를 모사한 그림,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 파이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참인 동시에 거짓인 문장이 된다. 그 어긋남 속에, 고정관념과 관습화된 사고는 어긋남을 겪는다. 그리하여 당황스러움이 피어오르고, 그곳에 감상자의 당혹감이, 감정이, 다시 말해 몸이 실재한다.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공연 말미, 화면에는 이 문장이 등장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떠올렸다. 이 공연은 무용의 배반이다. 동시에 시간성에 대한 배반이다.

 

 

 

브래키에이션(Brachiation)


 

Brachiation 포스터.jpg


 

브래키에이션(Brachiation)은 인류 진화의 한 단계로, 과거 유인원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던 독특한 움직임을 뜻한다. 이는 인류가 생존을 위해 처음으로 실행한 진화적 움직임이다. 작품은 여기서 출발하여, 몸이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통과하며 현재에 존재하는지 탐구한다.

 

연출가 김혜윤은 ‘브래키에이션’ 속 내포된 시간성이 과거의 행위가 미래를 위한 ‘진화적 조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존재가 소외된다고 바라본다. 소외된 몸의 현재성에 질문을 던지며, 현재의 몸을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연결고리’로 바라보는데, 몸이 시대를 살아가고 진화의 압력을 수용하면서도, 미래의 실험체로서 존재하는 다양한 경계의 몸을 무대 위에 그려낸다.

 

 

 

현재를 일깨우며


 

“우리의 몸은 과거와 미래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가?”

 

작품 <브래키에이션>은 질문한다.

 

인간의 시간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직선적이다. 시간은 앞을 향해 흐르며, 과거와 찰나의 현재,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의 시간에 대한 인식의 전부다.

 

어린아이들은 곧잘, 어제와 오늘의 시간을 구분하는 말과 그 이해의 틀이 없기 때문에 몇 시간에 걸친 이야기를 한 때에 몰아넣어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랄수록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분할 줄 알며,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항시 자신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상정하고 존재했던 과거에 머무른다.

 

무용수들은 저마다 어딘가를 경련하듯 떨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시나리오에 따르면 무의식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지극히 계산적으로 이를 행하고 있다. 눈을 떨고 숨을 몰아쉬고 발가락을 움찔거린다. 제어되지 않는 의식적이지 않은 경련과 같은 행동이 계산된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불일치가 발생한다.

 

이러한 불일치가 <브래키에이션>에는 계속 존재한다. 경련의 정도조차 연습 때마다 일정하거나 균일할 리 없다. 공연 예술이란 극도의 현재성을 갖기 때문에 어제와 오늘 공연의 시나리오가 같다 해도 결코 동일할 수 없다. 제어할 수 없는 것들, 그 순간의 감정과 그 전에 있던 일, 몸의 움직이는 정도까지 모두 같을 수는 없다.

 

 

Brachiation 컨셉사진 3 (c)BAKI.jpg

 

 

네 발로 기고, 두 발로 걷고, 뛰쳐나가고, 누군가를 질질 끌고 나가고, 하나처럼 몸을 얽어 곧추세웠다가 무너져도. 모든 것은 계획된 동시에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치 목표한 미래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빛을 향해 무용수들은 서로를 밀쳐내고 다시 끌어안으며 나아간다. 그 속에서 분투하는 몸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이 순간에 존재하지만, 역시 미래를 향한다는 점에서 현재성은 소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류의 진화 역시도 누군가의 선택이나 계획이 아니라 어쩌면 생존을 위해 비롯된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연한 경련, 우연한 눈짓, 우연한 식욕이 몸을 이전과는 다르게 쓰도록 했을 것이다.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관객이 사전 고지된 설명을 듣고 쌓아 올린 모든 이해에는 이 문장 앞에서 무너진다. 알고 있던 브래키에이션에 대한 정보는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상정하고, 브래키에이션을 기준으로 미래를 살아가고, 동시에 관객으로서 현재에 존재하며, 과거의 무용 동작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감상자를 당황스럽게 한다. 살아온 맥락에 맞춰 쌓아 올린 동작과 떨림에 대한 감상자의 이해는 엉망이 된다.

 

지난 무용 동작을 계속 상기하며 새로 보고 들은 것들을 그 틀에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감상자는 현재보다 과거를 의식하고, 이 공연의 결말이라는 미래를 생각한다. 그리하여, 다시 ‘브래키에이션’이 현재의 몸을 소외하듯이 감상자 역시도 감상하는 현재를 소외하고 있다. 남는 것은 느낌이다. 당혹스러움과 당황스러움. 그것은 몸의 반응이다. 그리하여 정해진 과거와 변화하는 미래 사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몸은 당혹감을 느낀 그제야 정말로 ‘현재를 살아가게 된다.’

 

무용수들은 누구보다 현재를 살아내고 있지만, 그 역시도 결국엔 미래―공연의 끝을 상정하고 있는 과거의 동작일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동작이 항상 과거의 것과는 같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이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현재를 살아간다.

 

관객 역시도 그렇다. 미래를 향해 내달리는 일직선의 시간성 속에서 이해해 온 모든 틀은 몰이해에 부딪힐 때마다, 여러 시간성이 중첩된 무용수들의 동작을 마주할 때마다 어긋남을 경험한다. 그로부터 피어오르는 당황스러움이야말로 현재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현재성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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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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