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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두 청춘은 세상의 끝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둘 앞에는 엇갈린 길이 놓여진다. 이 청춘 드라마에 감시, 통제, 사회 같은 언뜻 어울리지 않는 재료들이 버무리지며, 다소 서늘한 의외의 맛을 낸다. 학교란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상황에서 주인공들은 두 세상에 걸친 채 자신이 생각하는 정답을 지키고자 몸부림친다.
사실 위로의 감상이 두드러지는 점에서 '해피엔드'는 일본의 뉴 제너레이션이 만들어 내는 여타 영화들과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내 익숙함에 그칠 만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투쟁 같은 사회 드라마적 요소를 청춘 드라마에 제대로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소라 네오 감독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알아챌 수 있다.
코우가 사회 시위에 참여하며 유타와 틀어지는 순간부터가 그렇다. 학업이나 사랑 같은 청춘 드라마에 알맞는 갈등 요소를 차용하지 않고 사회적 문제를 끌고 온 것이다. 코우는 사회와 학교 두 곳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안전을 이유로 국민을 통제하며 자국민과 비국민을 '갈라치기'하는 총리, cctv로 학생을 감시하는 교장. 재일 한국인이자 불량 동아리 부원으로 낙인된 코우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입지를 깨닫는다. 지진으로 땅이 균열되듯 기존의 관점이 엇나가는 기분. 그런 그에게 여전히 무사태평한 도련님 유타는 열 뻗치는 존재로 느껴질 법 하다. 관객에게도 철 없는 아이 마냥 비춰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면을 전환하고 상황을 해결하는 존재는 유타다. 왜 유타일까? 극 중 내내 사회 개혁에 앞장선 코우가 아니고 말이다. 유타가 모두의 앞에서 교장의 차량을 망가뜨린 범인임을 자수하는 신에는 단상에 올라선 모습만 등장한다. 그가 어느새 올라왔고 어떤 표정으로 내려갔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감독이 직접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존재'라고 말했듯, 유타는 어떠한 규율이나 시선에도 얽매이지 않는 인물이다. 장학금 같은 사회 시스템에 엮인 코우와는 다르다. 그런 그야말로 바람처럼 등장해 기꺼이 모든 돌팔매를 맞으며 떠날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낸 연출인 셈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하나도 아이러니하지 않은 행동이다.
되려 감독은 코우에 대한 아이러니함을 제기한다. 교장의 차를 수직으로 세운 범인인 그가 학교의 사도처럼 앞장서는 모습이 과연 타당한지 묻는다. 동시에 기어코 코우가 장학금을 받도록 해 잔인할 정도로 그에게 양심의 시련을 부여한다.
이후에도 코우가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우정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청춘 드라마의 활기참보다 사회 구조를 통한 보상을 부여받아야 하는 숙명에 놓인 사회적 약자의 무력감을 묘사하는 데에 비중을 둔 것이다. 그야말로 사회 드라마와 청춘 드라마의 탁월한 조화에 방점이 찍히는 순간이자 소라 네오 감독의 몽글한 감성이 터지는 순간이다.
코우의 결말이 이렇다 해도,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는 청춘 드라마적 요소가 첨가된 사회 드라마가 아닌 사회 드라마적 요소가 첨가된 청춘 드라마다. 초반부, 타이틀의 뒷배경이 도심 속 푸른 나무 한 그루인 데에서 비유적으로도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유타와 코우가 서로의 우정을 지키려 애쓰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거대한 서브우퍼를 아지트로 옮기는 신이 주요하다. '넌 진짜 영원히 친구랑 즐거울 것 같아?' 라고 묻는 코우와 '그래! 나도 묻자. 길에서 소리 지르면 세상이 변해?'라고 되묻는 유타는 코우의 말대로 근본적으로 다를 지 모른다. 그럼에도 둘의 꿈이자 우정의 징표였던 서브우퍼에 누구도 손을 떼지 않는다. 통제의 도시에서 어둠으로 몸을 감추며 그 징표를 지키려는 모습은 무엇도 둘을 갈라놓을 수 없음을 말하는 듯 하다. 감독 또한 반드시 가져가야 했던 장면이라고 말할 만큼 둘의 깊은 유대감을 알 수 있다.
또한 청소년인 채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 유타는 영화의 장르를 청춘물로 규정지을 수 있게 하는 인물이다. 이를 설명하려면, 영화 '태풍클럽(1985)'과의 유사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피엔드'와 '태풍클럽(1985)'은 청소년의 역동성과 주체성을 강조하고 청소년을 독립적인 존재로서 성인과 구별짓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존재한다. '태풍클럽(1985)'의 미카미는 성장 과정에서 결국 어른이 되고 만다는 사실과 함께 이를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라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주변 어른들처럼 약아빠진 사람이 되기 싫었던 미카미는 학교에서 뛰어내리고 연출 상 짝사랑인 리에는 그 덕분에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난 것처럼 묘사된다. '해피엔드' 또한 마찬가지다. 유타는 교장 같은 어른은 되지 않겠다는 말을 하며, 끝에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퇴학하며 영원한 청소년으로 남는다. 유타의 '아이시떼루 (사랑해)' 대상이었던 코우는 낙인에서 벗어나 무사히 졸업한다. 이처럼 두 영화는 청소년의 결정권과 자유권을 지지하며 자아정체성을 존중한다. 그리고 유타는 이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캐릭터다. 소라 네오 감독은 자신만의 미래를 개척하는 청소년의 가능성에 박수를 보낸다.
영화에서는 일시 정지된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타이틀이 떠오를 때와 영화를 마무리할 때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이러한 장치가 있다면 의도성이 충분하다. 타이틀 뒤로 보이는 푸른 나무와 영화를 끝내는 둘만의 장난은 모두 동일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같은 음악이 쓰인 이유는 추측컨대 오프닝 장면에 있다. 근엄한 음악과 함께 속속히 드러나는 붉은 점들은 도시 속 수많은 cctv들을 의미한다. 감시하는 사회를 표현한 셈이다. 이 음악이 엔딩에서도 쓰였기에 여전히 둘은 사회의 감시 속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일시 정지된 화면 속 둘의 실없는 웃음에서 볼 수 있듯, 세상의 끝에서 둘은 결코 행복을 잃지 않을 것이다. 푸르른 청춘의 발버둥은 춤사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