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한 아름 꽃다발 같은 5월이 왔다. 서로의 존재를 향한 축복이 만개하는 달이다. 하나 사무치게 기억되어야 할 상실의 날도 5월에 있다.


1980년 5월 18일. 올해로 45년이 된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날이다. 교과서로, 영화로 배웠던 광주의 그날이 유난히 실체로 다가오는 근래였기에 연휴를 맞아 직접 광주에 가보기로 했다. 여러 군데를 둘러보았지만, 그중에서도 광주광역시가 지정한 5·18 사적지 중 하나인 ‘전일빌딩’에 다녀온 후기를 여기에 남긴다.


전일빌딩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지리상이나 그 상징성에 있어서 중심적인 건물이었다. 시위대가 모여든 전남도청 일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기에 시위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으며, 「전남일보」와 「전일방송」이 들어서 있었기에 신군부의 주요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이후, 건물 점검 과정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명하는 탄흔 245개가 발견되면서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에 5·18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한 마디로 전일빌딩은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과 진실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곳이다. 현재는 ‘전일빌딩245’로 이름 지은 이곳은, 2020년 리모델링 사업 이후 전시장, 휴게 공간, 디지털정보도서관, 광주 콘텐츠 허브 기업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픈 역사를 되새기면서도 새롭게 나아갈 미래를 창출하고자 다채롭게 꾸며진 공간인 셈이다.


전일빌딩은 기억의 가치를 오롯이 전한다. 올곧게 쌓인 기록으로 상처를 왜곡 없이 바라볼 때, 5월은 조금씩 더 편안히 미소 짓지 않을까.

 

 

 

꼭대기에서부터 - 평화의 땅을 밟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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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기념공간을 방문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면, 꼭대기 층의 옥상정원부터 관람을 시작하면 된다. 무등산을 배경으로 광주 시내와 5·18 민주광장을 탁 트인 시야로 구경할 수 있다. 잠잠한 도시의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면 평화란 영원히 깨어질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진다. 그날 유난히 날이 흐려서였는지 광주의 땅이 참 고요하고 무탈해 보였다. 그리고 옆에서 관람을 이끄시던 문화해설사분이 우리가 서 있는 바닥 바로 아래에 헬기 사격의 탄흔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있다고 안내하셨다. 그렇게 곧 평화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고자 하는, 조금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층계를 내려갔다.


5·18 이후, 이 잔혹하고 숭고한 역사적 사건을 공연한 사실로 인정받기 위해 또다시 싸워왔던 날들을 조명하는 인트로 영상과 함께 기념 전시는 시작되었다. 코너를 돌자, 유리 스카이워크 속에 보존해 둔 옛 건물의 바닥과 기둥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 245개의 탄흔에 하나하나 번호가 붙어 있었고, 밖으로 향해있는 기둥에 새겨진 흔적을 잘 볼 수 있도록 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얘기로만 듣는 것과 직접 목격하는 것은 역시나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그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가차 없이 패어있었다. “와, 정말이구나. 실제 상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게 하는 충격이다. 또 한편으로는, 마치 위대한 예술 작품을 보존하듯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아주 명백히 보이도록’ 탄흔을 전시해 둔 주최 측의 노력에서 그 간절함과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기록물이나 증언의 형태가 아닌 물리적 존재 그 자체로 국가 폭력의 만행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에 더욱 그 가치가 크게 와닿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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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흔을 통해 과학적으로 분석한 사격의 위치와 총기의 종류까지 해설되고 나면, 이제 그 공간을 더욱 생생하게 재구현한 전시가 이어진다. 1980년 금남로 거리를 본뜬 축소 모형 위로, 굉장한 위압감을 주는 헬기 모형까지 제작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실감 나는 설치물과 함께 상영되는 주제 영상은 당시 사격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연출되었다. 선대의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의 안전망 속에서 자라난 내 또래의 한국인이라면, 5·18은 도저히 믿기 힘든 참극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 구성은 그때의 광주 시민들이 한 인간으로서 겪었을 공포에, 시대를 건너 어떻게든 연대하도록 온 감각을 집중시킨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을 이어가고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것의 중요성을 공감하도록 하는 안내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상에 띄워진 유명한 문장이 나를 치고 갔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는 언젠가의 현실이었다는 것을. 이미 존재한 현실이 미래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는가? 제대로 기억하려 애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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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전시는 헬기사격을 비롯해서 5·18 민주화운동을 둘러싼 각종 왜곡과 가짜뉴스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신군부가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 ‘내란’으로 규정하고 낙인찍은 후, 숭고하게 기려져야 마땅할 광주 항쟁은 오해의 말에, 특히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자 의도한 말에 의해 끊임없이 상처받아 왔다. 광주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폄훼되는 것은 최근까지도 뉴스를 통해 꾸준히 보아왔기에, 이런 지난한 왜곡의 역사가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음을 전일빌딩 5·18 기념공간은 탁월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진실의 문’이 전시장 곳곳에 마련되어,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표적인 가짜뉴스가 적힌 문을 열면, 객관적인 증거에 기반하여 그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게다가 전일빌딩에서 사용했었던 문이라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오늘날에 답하는 의미 있는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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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금 더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추모의 공간을 맞이한다. 터치스크린을 통해 추모의 말을 남길 수 있었지만, 무슨 말을 떠올리려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혹시 당신이 전일빌딩에 방문하게 된다면 용기 없는 나 대신 몇 글자 추모의 말을 남겨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린다.


예술의 도시 광주답게 마지막은 ‘백골이 되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 영령을 추모하는 엔딩영상’으로 마무리되었다. 하이얀 뼈가 꽃으로 피어나는 것을 보며 슬픔, 죄송스러움, 희망, 위로 등이 섞인 알 수 없는 감동을 먹먹히 가슴에 안고 전시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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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층 아래인 9층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기획전시가 열리는 곳이다. 나는 올해 5월 2일부터 내년 3월 31일까지 진행되는 ‘증인:국경을 넘어’를 관람하고 왔다.


해당 전시는 국경을 넘어 5·18 민주화운동에 기꺼이 참여하고 조력했던 외국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평화봉사단으로 파견된 데이비드 돌린저, 선교활동을 하러 광주에 온 아놀드 피터슨 목사, 광주 선교사 마을에서 태어난 제니퍼 헌틀리. 이 세 인물은 모두 광주를 떠날 수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남기를 선택했다. 두 눈으로 목도한 인권의 말살을 외면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돕고자 나섰다. 그들이 회고한 열흘 간의 항쟁을 따라가 보면, 사건의 실재성은 더욱 명명해지고 시민들의 용기는 한없이 위대해진다.


내 일이 아닌 것으로 두고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사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움에도, 광주에 남았던 외국인들의 존재는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끔찍한 세계에서도, 인간은 인간을 살린다. 제니퍼 헌틀리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다름 아닌 평범한 인간들이 빚어낸 역사이다.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내려와서 나는 다시 평화가 내린 광주의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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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부터 2025년이 오기까지. 45주년을 맞은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전일빌딩 5·18 기념 공간에서 나의 존엄한 인간성을 겸손히 깨우치고 간다. 외부의 폭력에 의해 살해되는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느꼈고, 또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인간성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를 느꼈다.


가정의 달 5월, 존재함을 기쁨과 환희로 만끽하자. 그리고 45년 전 오늘 같은 봄날에 벌어진 커다란 상실이 남기고 간 무게도 잠시나마 돌아보자. 기억하는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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