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만큼 좋아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나에게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작은 도피처이다. 그곳에서는 싫은 것도 견디는 법은 잠깐 잊고 오로지 나의 취향에만 집중할 수 있다. 여행을 떠나며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기도, 오래된 취향을 무르익히기도 한다.
나는 식후경보다는 ‘경후식’에 가까운 사람이다.
남들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던데, 나에게 여행에서 ‘식’은 가장 아무래도 좋을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풍경을 만끽하는 것이다. 바다의 곁에서 몇 시간이고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따금 푸르른 숲 속의 솔향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어지기도 한다.
인적이 드물고 아름다운 경관, 이어폰 속 음악만 있다면 아무 것도 없는 맨바닥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나의 소소한 여행 신조가 아닐까 싶다. 질리도록 풍광을 맛본 후에는 보통 예술을 찾아 나선다. 작은 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 책방 가판대 위 코멘트와 함께 놓인 신간, 오래된 상영관에서 만난 독립영화 등 지역의 색이 짙게 베인 예술은 평소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쇼핑에 크게 돈을 쓰지 않으려 하지만 새로운 지역에 가면 꼭 빈티지숍을 들른다.
특이하고 화려한 옷을 나만의 방식으로 조합해 입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은 나에게 빈티지 의류는 단순한 소비재를 넘어 나의 정체성을 이루어 주는 요소이다. 여행 중 만난 옷을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접하고, 일상으로 옮겨오며 여흥을 이어갈 수도 있다.
인생에서 해외 여행은 단 두 번 뿐이었지만, 국내 지도 위로는 촘촘히 별을 수놓았을 만큼 이제는 꽤 두둑이 쌓인 여행 기억들을 지역별로 조금씩 꺼내 보며 수확을 이뤄보면 어떨까 싶다.
에피소드를 이어가면서 내가 기억하는 각 여행지의 매력과 가장 마음이 가던 장소에 대해 써 내려가 보고자 한다.
따스한 바다의 도시, 통영
통영 여행을 마친 후 들었던 생각은 꽤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은퇴 후 인생 2막을 시작하게 된다면 꼭 통영을 터로 잡고 싶다는 것이었다.
따스한 온정을 가지고 바다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이 보여준 마음은 서울 토박이인 내게 마치 향수병과 같은 그리움을 심어주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나는 온전히 스스로에 집중하는 편이다. 주로 여행지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고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내 안에 이루어지는 감상에 집중하곤 한다.
그러나 통영은 나에게 사람과의 소통을 통한 즐거움을 일깨워 준 유일한 여행지였다.
통영의 인심은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프렌차이즈 카페에서는 이용객들에게 무료로 자전거를 대여해 주고 있었고, 작품 수집이 취미인 게스트 하우스 호스트는 전시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내게 숙소 그림들을 도슨트 해주었다. 서울에서 온 취준생이라는 말에 기념품 숍 사장님은 내가 산 것보다 더 비싼 키링을 덥썩 쥐어 주기도 했다.
극단적 내향형 인간인 나에게 사실 일상에서 타인과의 소통은 때로 해치워 버려야 할 업무와 같았다. 그리하여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이라는 도피처에서는 혼자임을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을 사수하려 했다.
그런 내게 통영의 사람들은 새로운 작품, 옷, 풍경 뿐 아니라 새로운 사람을 통해서도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이토록 단 기간에 통영에 애착을 가지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건 역시 바다이다.
단순히 바다가 있다는 이유라기 보다는 통영에는 바다의 풍광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해안가에는 잘 닦인 도로가 조성되어 있고, 특히 바다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도록 낮은 턱으로만 길이 이루어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해안 도로를 따라 라이딩을 하다 보면 시시 각각 다른 색과 빛깔로 파도 치는 바다의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고양이들이 느긋한 움직임으로 도로 위에 나타나곤 한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시원한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따스한 햇살 아래 그루밍 하는 고양이들을 살피던 나른한 시간들이 있었고, 그 시간들은 또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