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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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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순식간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뒤, 반정부 인사에 대해 불법 체포와 모진 고문, 강제 추방 등을 일삼으며 사회 전반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우리의 지나온 아픈 과거이자, 어쩌면 현재 진행형이었을 수도 있을 이 비극은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도 똑같이 벌어졌었다.

 

<계엄령의 기억>은 군부정권에 의해 남편이 강제실종 된 뒤, 혼자 다섯 명의 아이를 책임지며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나갔던 에우니시 파이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그의 아들 마르셀루 루벤스 파이바의 회고록 ‘아임 스틸 히어’(I’m Still Here)를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올해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등 각종 시상식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해변가에 있는 파이바의 집에는 언제나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남미의 따사로운 햇살과 활기찬 분위기로 가득한 이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겉으로 보기엔 완벽해 보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부정권의 어두운 그늘에 놓여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해변 도로를 따라 지나다니는 장갑차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군용 헬리콥터 그리고 드라이브를 즐기다가 불시에 받게 되는 폭력적인 검문은 이들의 잔잔한 일상에 균열을 내며, 애써 외면하려 노력했던 군부독재의 현실을 자꾸만 일깨워준다.


테이블 모서리 위에 놓인 유리잔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평화로운 일상은 결국 다섯 아이의 다정한 아빠이자 든든한 남편인 전 국회의원 후벵스 파이바가 불법 체포되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이어서 에우니시와 둘째 딸 엘리아나도 군 관계자에 의해 시야를 차단당한 채 의문의 장소로 끌려가고, 딸과 떨어진 에우니시는 벽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신음과 비명을 들으며 반복되는 심문을 받는다. 그녀는 딸과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그렇게 어두운 독방에 갇힌 그녀는 작은 창문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통해 자신이 이곳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가늠하며 그 시간을 견뎌낸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벽에 선을 그어가며 삶의 의지를 다지던 에우니시는 마침내 풀려나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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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제대로 씻지 못한 그녀가 집에 오자마자 한 일은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확인하고, 깨끗하게 샤워하는 일이었다. 여전히 생사를 알 수 없는 남편에 대한 걱정과 딸과 함께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가 심문당한 정신적 충격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무기력하게 굴복하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하기 결심한다. 거품을 잔뜩 묻혀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닦는 그녀의 모습에는 멋대로 자신의 일상을 뒤흔든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자신이 받은 상처와 고통을 말끔히 씻겨 내려버리겠다는 그녀의 굳은 의지가 담겨있다.


그 뒤로 에우니시는 남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수소문했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후뱅스가 망명을 위해 나라를 떠났다는 군부정권의 허위 보도뿐이었다. 결국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 에우니시는 그날 이후, 남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고, 군부독재가 자행한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친 긴 싸움을 시작한다.


저명한 인권변호사가 되어 국가에 끝까지 책임을 물은 에우니시의 노력은 마침내 1996년, 브라질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후뱅스가 단순 실종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을 담은 사망진단서를 공식적으로 발급받는 성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는 긴 투쟁의 끝을 의미하진 않는다. 군사정권은 1979년 사면법을 제정해 군사정권 시기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처벌을 금지했고, 가해자들은 법적 처벌을 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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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국가가 자행한 폭력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여전히 그때의 아픔에서 한치도 벗어 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한 에우니시는 세상이 무너질듯한 슬픔을 애써 감춘 채, 아이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는다. 아이들과의 소중한 순간에 집중하려 애쓰던 그녀의 시선은 문득 다정하게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다른 가족들에게로 향한다. 상처 입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수많은 행복한 가정의 장면들이 오히려 그녀에게 깊은 아픔으로 다가올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영화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완벽히 회복시킬 수 있을까? 바우테르 살리스 감독은 그 답의 힌트를 파이바 가족이 캠코더와 필름 카메라로 담아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 따뜻하고 생기 넘치는 필름 특유의 빈티지한 질감으로 기록된 그들의 행복한 일상은 단순히 삶의 빛나는 한 조각을 포착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이 남긴 기록은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이며, 과거를 잊지 않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로 쓰인다. 영화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완벽히 회복시킬 수는 없지만, 흩어진 기억을 하나하나 재구성해 잊지 말아야 할 과거를 상기시켜 주고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져준다.

 

브라질은 먼 길을 돌고 돌아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하지만, 과거 청산은 완벽히 이뤄지지 않았고, 많은 극우주의자는 과거의 기억을 오염시키고 군부독재를 미화하며 역사를 다시 쓰려고 하고 있다. 이는 브라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아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I’m Still Here’라는 원제를 통해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 될 과거를 되풀이하려는 이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며, 동시에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따뜻한 연대의 마음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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