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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당신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나요 - '소울' [영화]

픽사가 읽어주는 행복한 시지프 이야기

by 윤희수 에디터
2025.06.03 13:44

 

 

*

영화 '소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살까? 우리는 흔히 삶의 목적성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가지는 역할, 혹은 적어도 기능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나라는 존재가 생겨났으니 반드시 무언가를 해내야만 하는 연쇄가 안배된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모든 삶에 이유가 있다면, 이유가 없는 삶은 존재조차 할 수 없는가.

 

영화 '소울'에는 아직 몸을 얻지 못한 푸른색 영혼들이 지구로 태어나는 데 필요하다는 마지막 한 칸, 'Spark'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이 존재 이유라고 오해하는 그 불꽃을 보며 불현듯 '시지프 신화'가 떠올랐다. 21세기 시지프의 이야기를 담았는지도 모르는 이 영화. 그 속 22번의 불꽃은 카뮈가 말했던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인간적 반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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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나요


 

주인공 조 가드더는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다. 음악에 영 흥미가 없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 반복되는 일상은 조가 생각했던 '진짜 인생', 그 빛나는 삶과는 다르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삶은 그토록 벅차올라 보이는데. 이 둘 사이의 간극은 조의 삶을 무료하게 한다. 그는 무대장치가 붕괴되는 느낌을 겪기도 전에 이미 권태 속에 잠겨있다. 의식이 깨어나지 않은 정적인 권태는 조가 생활의 연쇄 속에 능동적으로 돌아오게 하지도, 부조리를 끝내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기다린다. 자신의 삶을 바꿀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오기를.

 

 

무대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이 끝날 때 느껴지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권태는 의식을 깨워 일으키며 그에 뒤따르는 과정을 야기한다. 뒤따르는 과정이란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의 연쇄 속으로 되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정적인 각성일 수도 있다. 각성 끝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결과가 생기는데 그것은 자살일 수도 있고 원상 복귀일 수도 있다.

 

-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30p

 

 

그 기회는 마침내 찾아온다. 조의 '인생의 목표', 그가 태어난 이유, 그러니까 진짜 음악을 할 수 있는 기회. 재즈 밴드의 무대에 설 수 있는 오디션에 합격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날, 기쁨에 도취되어 길을 걷던 그는 맨홀에 빠져 죽는다.

 

조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후세계인 'The Great Beyond'에서 도망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들이 모여 있는 'The Great Before'로 떨어진다. 그곳에는 아직 존재하지 못한 영혼들이 각자의 성격을 부여받고 지구 배지의 'spark'를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스파크를 채우지 못한 지 오래인 영혼 '22번'. 조는 태어날 의지가 없는 22번의 지구 배지를 채워 본인이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22번의 멘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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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번을 거쳐 갔던 다른 멘토들처럼 조도 마찬가지로 22번의 재능, 혹은 특별한 소명을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베이킹? 운동? 어쩌면 조 자신처럼 재즈? 음악이 조의 인생의 단 한 가지 불꽃이었듯, 22번에게도 마주치면 기적처럼 타오르는 그 불꽃이 있을 것이라고, 조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그 무엇에도 22번의 스파크는 반응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관객은 고민하게 된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지구 배지의 스파크는 무엇일까 하는 고민. 혹시 나도 22번처럼 삶을 불태울 특별한 소명을 찾지 못한 채로 지구에 떨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 태어났는가? 그 이유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이 불안감은 22번의 감정을 잠식한다. 목적이 없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22번은 태어나기도 전에 삶을 포기해 버린다.


 

 

시지프의 돌은 정상에 올라도 다시 떨어진다


 

22번은 자신과 달리 분명한 '스파크'가 보인다고 생각한 조에게 자신의 지구 배지를 넘겨준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온 조. 그는 그토록 바라던,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바로 그 재즈 공연을 해낸다. 관객들은 열광하고, 동료들은 그의 실력을 칭찬한다. 그의 인생이 정점을 맞이한 것이다. 영화의 본격적인 철학적 전개는 이 이후부터 시작된다. 공연이 끝나고 조는 생각한다. '이게 끝이야?'.

 

언덕의 정상까지 돌을 밀어 올린 시지프를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권태다. 그리고 조와 함께 시지프의 돌을 밀고 있던 것은 바로 관객. 시간 내에 양복을 수선할 수 있기를, 의식이 성공해서 영혼이 다시 조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기를.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조와 밴드 공연을 서기만 하면 해피엔딩이 오리라 믿었던 관객은 그렇게 의도치 않은 뒤통수를 맞는다. 돌은 굴러내려 가고 시지프스는 다시 돌을 밀어 올린다. 물론 돌은 다시 굴러떨어지겠지. 조가 평생을 기다려왔던 바로 그 순간이 지나고 그의 삶이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Dorothea: What's wrong, Teach?

Joe: It's just I've been waiting on this day for... my entire life. I thought I'd feel different.

Dorothea: I heard this story about a fish. He swims up to this older fish and says, "I'm trying to find this thing they call the ocean." "The ocean?" says the older fish. "That's what you're in right now." "This?" says the young fish. "This is water. What I want is the ocean."

Dorothea: See you tomorrow.

 

- 영화, '소울' 도로시아와 조의 대화 중

 

 

'삶의 목적'이 충족되리라 믿었던 정상의 밤은 아무 변화를 불러오지 못했다. 어린 물고기는 바다를 애타게 찾지만,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는 바로 그곳이 이미 바다이기에 바뀌는 것은 없다. 조는 이제야 삶의 본질적 부조리를 직면한다. 무대장치가 붕괴되고 조는 길을 잃었다. 다음 할 일을 찾지 못하는 조에게 도로시아는 내일 보자고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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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삶은 반복된다. 조는 마침내 "왜?"라는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 답이 없었다는 답. 조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그 인생의 목표란 훨씬 빛나는 것이었기에 22번이 살기로 결심한 그 소소한 삶의 이유는 도무지 그가 납득할 수 없는 범위의 것이었다. 하지만 배지의 빈칸은 삶의 목적이 아니었고 22번도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게 아니었다. 부조리한 인생 속 희망이 기망일 뿐임을 인식했을 때 마침내 조는 스파크의 정체를 깨닫는다.


 

 

스파크는 삶의 목적이 아니야, 이 열정 넘치는 멘토들아


 

부조리를 벗어날 길이 없음을 깨달은 인간은 왜 삶을 선택해야 하는가. 삶을 바꿀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것도 없고 인생이 끝이 정해진 허무뿐이라면 말이다. 끝이 있다는 사실. 우리는 결국 죽는다는 사실은 절망과 함께 무한한 자유를 준다. 마치 사형수처럼. 그리고 심지어 삶에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결국 무거운 무대장치 따위는 벗어던지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 되는 걸까? 각성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은 두 가지. 부조리한 삶을 포기하거나, 그 부조리로 다시 걸어 돌아가거나.


그리고 스파크는 후자를 선택하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에 타오르는 불꽃이다.

 

 

부조리의 인간은 이렇게 불처럼 뜨거우면서도 얼어붙은 듯 싸늘하고, 투명하고 한정된 세계, 아무것도 가능한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이 주어진 세계, 그 한계 밖으로 넘어서면 붕괴와 허무뿐인 하나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그 같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로, 그 세계에서 힘을, 희망의 거부를, 그리고 위안 없는 한 삶의 고집스러운 증언을 이끌어 내기로 결심할 수 있는 것이다. (...)

 

부조리에 대한 성찰은 비인간적인 것을 고통스럽게 의식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 여정의 종점에 이르면 인간적 반항이라는 열정에 찬 불꽃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시지프스 신화, 91-96p

 

 

제리는 말한다. 우리 열정 넘치는 멘토들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스파크는 삶의 목적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라고. 처음 맛보는 피자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악사. 처음 감각하는 영혼에게는 전율에 가까운 경험들. 가끔 눈이 부시게 해가 비치는 날에는 행복감과 함께 '아, 살아있는 것은 좋은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찰나의 감정들, 한순간의 잔상, 순간이 남긴 결. 이런 흔적들이 모여 스파크를 완성한다. 만약 22번의 지구 배지에 그림이 새겨졌다면 그날의 선선한 바람이나 햇살, 나뭇잎 같은 것이 그려져 있지 않았을까.


하늘을 보는 것, 걷기를 잘하는 것. 이게 내 스파크일지도 모른다는 22번의 말에 그런 건 목적이 아니라 그냥 삶 그 자체라는 조의 핀잔이 사실 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삶은 본질적으로 반복되고, 너무나 부조리하며, 의미라는 것은 없어 보인다. 그 권태로운 반복 속에서 깨워진 의식으로 이 모든 것을 인식하였음에도 살아가기를 선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카뮈가 말하는 '반항하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살아있고 싶기 때문에 살기로 한 그 선택의 순간, 스파크는 채워진다.

 

22번은 이미 살기로 선택했음을 깨달은 조는 22번에게 지구 배지를 돌려주고, 자신의 'The Great Beyond'로 사라지려 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신적 존재는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다. 새로운 삶의 시작에서 조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Jerry: So what do you think you'll do? How are you gonna spend your life?

Joe: I'm not sure. But I do know... I'm going to live every minute of it.

 

- 영화 '소울', 제리와 조의 대화 중

 

 

그는 답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매 순간을 살아볼 생각이라고. 무대장치가 붕괴된 이후에도 조가 목적 없는 삶을 살아보기로 '선택'한 최초의 순간이다. 이 순간 조에게 지구 배지가 있었다면 아마 반짝-하고 스파크가 켜지지 않았을까.

 

소울은 왜 살아야하는가보다는 살아있음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느낌 그 자체에 집중한다. '삶에 목적이 없어도 괜찮아' 까지의 메세지와 함께. 카뮈는 그에 한발짝 더 나아간다. 목적이 없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에는 목적이 없으며, 이 같은 부조리가 끝없이 반복되고, 그럼에도 그 여정의 종점에서 삶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어린이들을 위한 시지프 신화는 자살과 반항이라는 극단적 선택지보다는 조금 덜 냉혹한 세상을 보여주기로 선택한 모양이다. 인간적 반항이라기보다는 부드러운 선언에 가까운 '매 순간을 살아보겠다'라는 조의 말에서 행복한 시지프가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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