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달 전, 그러니까 런던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런던 동부에 위치한 스트랫포드(Stratford)라는 지역의 에어비앤비에 머물고 있었다. 숙소에는 총 4개의 방이 있었고, 가끔 주방에서 다른 방의 투숙객들과 마주치면 대화를 나누고는 했다.
스트랫포드 근처 교회 사진. 출처: 직접 촬영
어느 겨울날 오후의 이야기
여전히 쌀쌀하지만 제법 날은 맑은 어느 날 2월 오후였다. 나는 여느 때처럼 아메리카노를 내리기 위해 숙소 주방에서 그라인더로 원두를 간 뒤, 서버에 필터를 세팅한 후 물을 끓이고 있었다.
딸깍.
물이 다 끓은 포트에서 소리가 났고, 끓은 물을 핸드드립용 주전자로 옮겨 적당한 크기로 갈린 원두를 살짝 적셔주었다. 물을 붓기 전에 원두를 살짝 불려 주면 더 깊은 풍미를 낼 수 있다고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2년 전 첫 런던 생활을 하기 직전 구입한 커피 그라인더와 좋아하는 영국의 커피 브랜드 몬머스 (Monmouth)의 싱글 오리진 봉투다. 출처: 직접 촬영.
원두를 불리는 동안 주변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원을 그리듯 조금씩 추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주방에 들어온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내 옆방에서 지내고 있는 이태리 노인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주방에서 마주치면 종종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너, 제법 멋진 도구로 커피를 내리고 있구나? 커피를 좋아하니?”
“네, 한국에서부터 핸드드립 커피 내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커피향 맡으면서 물 따르는 순간이 좋아서요.”
“그렇구나!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이 카페를 했단다. 종종 부모님을 도와서 나도 커피를 내렸었는데, 그 땐 기계가 많지 않아서 전통적인 장비로 커피를 내리곤 했어.”
“오, 그렇군요. 전통적인 장비라니 오히려 흥미롭네요”
대화를 이어가는 동시에 나는 점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내리고 있던 커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였고, 그는 이태리 사람이었다. 심지어 어릴 때 집에서 카페를 운영했었다니. 나는 혹여나 그가 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보고 기겁하며 맘마미아를 외칠까 우려되어 애써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커피를 다 내렸다. 나는 태연하게 자리를 정리한 후, 얼음들이 부딪치며 짤랑짤랑 소리를 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든 채 노인에게 인사했다. 주방을 뜨려는 순간, 노인의 시선이 내 커피에 닿았다. 이윽고 그는 말했다.
“너, 전문가구나! 커피를 잘 아는 사람일수록 블랙 커피를 마신단다. 좋은 하루 보내렴!”
외국 카페에는 아메리카노에 라떼보다 적은 양의 우유를 섞은 화이트 아메리카노 (White americano)라는 메뉴가 있다*. 일부 한국 카페에서도 요청 시 주문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태리 노인의 말에서 블랙커피란 한국인들이 주로 선호하는 우유를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의미한다. 그는 내가 커피에 얼음을 넣은 것 대신 우유를 넣지 않은 것에 주목하여 기분 좋은 말을 건네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외국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 국가의 문화에 따라 점원이 “Black or White?”라고 묻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때 “Black”이라고 대답해야 한국식 아메리카노가 나온다. Ice americano 대신 Long black이라는 표현을 쓰는 카페도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두 커피의 추출 방식은 다르지만 맛은 비슷하다.
이태리 노인, 그는 누구인가
“나는 극동 문화권에 대한 동경이 있단다. 특히 남은 인생은 태국에서 지내고 싶어. 여름엔 좀 습하고 덥긴 하지만 말이야. 한국은 아직 안가봤는데, 언젠가 들러보고 싶구나”
이름도 모르는 그 이태리 노인의 삶은 제법 독특했다. 지금까지 30여개의 국가를 여행했고, 그 중 영국을 포함한 몇 나라는 여러 번 방문했다고 한다. 특히, 지난 해 은퇴 후 모아둔 돈으로 1년의 반 이상을 해외에서 지내며 본격적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다음 행선지는 콜롬비아와 인근 남미 국가들이다.
“너는 유럽과 너희 고향 중에 어디가 좋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시겠지만 각자의 장점이 있잖아요. 한국에서 유럽을 자주 가기는 어렵다보니… 일단 지금은 유럽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동아시아와는 색다른 문화도 신기하구요. 어르신이 동아시아를 좋아하시는 이유랑 비슷한거죠.”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는 내 고향을 정말 좋아하지만, 가끔 싫었단다. 가족중심적인 사회와 사람들이 지나치게 겉치장에 신경쓰는 분위기가 버거웠어. 그치만 보렴. 나는 가정을 꾸리지 않았는데도 재밌게 살고 있잖니?”
나는 그가 말한 이탈리아 사회의 특징을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 노인은 자신이 경험한 이태리 사회의 틀을 벗어나 소신껏 살고 있었다.
사실, 한 편으로는 그의 그런 삶이 가능한 이유가 재산이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럼에도 그 재산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그의 선택이기에, 여행을 다니며 여생을 보내기로 한 그의 결정이 제법 멋있어 보였다. 그런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기에 당신의 문화권에서는 다소 낯설 수도 있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도 따뜻한 말을 건네준 것 같다.
영국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느낀 것 중 하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정말 정해진 답이 없다는 것이다. 약 3주 간 같은 숙소에서 지냈던 이태리 노인처럼 가족없이 여행하는 삶을 사는 것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적절한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도 모두 존중받아야 할 삶의 형태다. 다만, 그러한 삶을 살기로 결정한 이유를 내부에서 찾은 사람들의 내실이 더욱 단단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자신만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그것대로 크고 작은 결정을 해나가는 것. 표현은 간단하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내내 이어지는 과제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도 늦겨울에 만났던 이태리 노인처럼 내 소신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