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편지를 써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 초등학교 시절 시험 기간이 되면 당신은 내게 응원 편지를 써줬는데. 언젠가 학교에서 부모님에게 편지를 받아오라는 숙제를 내줬을 때도 긴 손 편지를 써줬던 기억이 나. 나는 그 편지들을 읽는 게 너무 좋았는데, 한 번도 답장을 보낸 적은 없었어. 진심을 담아 경건하게 고마움을 표하는 게 어쩐지 조숙한 척을 하는 것 같았거든.
나름 컸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은 뒤에도 쑥스럽긴 마찬가지였어. 우리는 다정한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농담과 장난을 치고 차라리 짜증을 부리는 게 익숙하잖아. 여전히 아이처럼 구는 내가, 와중에 머리는 컸다고 바락바락 대드는 일만 늘어난 내가 어떻게, 평소에 이런저런 것들이 고마웠고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쓸 수 있겠어.
게다가 나는 내 주변의 단점을 손쉽게 발견하고 미워하는 삐뚤어진 사람이라서, 항상 내 곁에 있는 당신을 누구보다 자주 미워해 버렸어. 언젠가부터는 대화도 길게 나누지 않으려고 했지. 가끔 실없는 농담만 던지고, 무책임하게 굴고, 그러면서 필요한 것은 성실히 받아내고. 이따위로 구는 애인을 뒀더라면 친구들이 펄쩍 뛰면서 당장 헤어지라고 했을 텐데. 이렇게나 비겁한 나를 어떻게 참아줄 수 있는지, 참는 걸 넘어 어떻게 그다지도 사랑할 수 있는지 생각할수록 경이로워. 부모의 자애란 대체 뭐야? 극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 같아.
그런데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좀 어려워. 이기적인 건지, 아니면 내가 사랑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지. 사랑한다는 것은 남까지 나의 개념을 확장하는 거라는데, 스스로 끔찍하게 미워하는 바람에 남을 사랑하는 것도 어려워져 버린 건지. 그게 싫어서 올해는 내 삶을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었거든. 요즘 내 취향에 맞는 물건을 사들여서 방을 채우고, 제철 음식을 먹으러 다니면서 계절을 꼼꼼히 느끼려고 하는 것도 다 그래서야.
내 삶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사랑하고 싶은 건 당신이야. 받은 만큼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야. 알다시피 그렇게 책임감이나 염치가 있는 사람은 아니라서.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인데,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가능성은 아주 낮을 테니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을 공들여 사랑할수록 내가 더 즐거워질 것 같거든. 당신과 나는 많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당신을 더 사랑할수록 나는 자주 행복해지겠지. 그래서 당신을 성실하게 사랑해 보려고 해. 부치지 않을 이 편지의 수신인을 당신으로 정한 것도, 부지런히 사랑하기 위해서야.
나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면 좋을까? 알면 사랑한다고, 정확히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니까, 당신을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평소에는 내 방에 한사코 들어앉아서 당신을 내다보지를 않았으니.
나는 당신처럼 신경이 굵은 여자를 본 적이 없어. MBTI 검사 결과가 나와 똑같은 게 나왔던데, 아무리 봐도 우린 너무 달라. 난 나약해 빠졌는데, 당신은 어려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지. 매일 같은 직장을 30년 넘게 다니면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으면서도 생색을 내지 않았잖아. 생각할수록 대단하다고 느껴. 요즘처럼 몇 년마다 직장을 갈아치우는 게 일반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더더욱이. 나 같으면 힘들게 번 돈을 흥청망청 쓰고 싶을 텐데, 당신은 소탈하게 살면서도 억울해하지도 않지. 그 와중에 삶의 재미도 바지런한 다람쥐처럼 찾아다니고.
당신은 참 경도가 높은 사람이야. 어지간한 것들은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잖아. 당신은 속이 상하더라도 금세 잊어버리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단단하고 명랑한 사람이잖아. 때때로 경도 높은 당신에게 무른 나는 쉽게 긁혀버리기도 하지만, 원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으니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또 다른 당신은 나보다도 경도가 낮은 사람이지. 무르고 유약한 당신은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의 감정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 특히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해 주잖아. 아마 내가 진지하게 설명해 주기만 한다면 그게 세상에 뭐가 되었든 당신은 공감을 해줄 것 같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더라도, 그래, 네가 원하면 그렇게 살아라, 말할 게 분명해. 나를 표나게 사랑하고 응원하는 당신 덕분에 나는 마음껏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은 주변 사람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요리를 참 잘하지. 자주 반찬 투정을 하면서도, 어떤 음식들은 당신이 만든 게 가장 맛있다고 느낄 때가 많아. 지치지도 않고 매일 아침 음식을 만들어서 우리를 먹이잖아. 외출하려다가도,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더라도 내가 부엌에서 기웃거리고 있으면 쏜살같이 달려와서 밥해 먹이는 사람. 당신의 밥을 먹고 내가 이만큼이나 자랐어. 당신이 예견한 것처럼 언젠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음식을 보면서 당신의 부재를 느끼겠지. 일단 열심히 먹어두고, 미래에 덜 슬퍼할 수 있도록 당신의 레시피를 배워둬야겠다.
이렇게나 다른 사람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 신기해. 아마 서로의 농담을 재미있어하기 때문이겠지. 농담이 통하는 건 정말 중요하니까. 나는 대체로 당신들이 던지는 농담이 하나도 재미없다고 생각하지만, 재미없는 농담을 서로에게 던지며 깔깔거리는 당신들이 좋아.
평소에 무신경하다가 갑자기 열심히 사랑하려고 하니 영 쉽지 않다. 그래도 노력하면 사랑도 늘지 않을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노력하라고 하잖아. 그래서, 당신을 조금 더 자주 생각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당신의 귀여운 점들을 찾아보려고 해. 인간 대 인간으로 당신을 더 사랑해 보고 싶어. 우리가 더 친밀해지면 좋겠거든. 가장 각별한 이들끼리 친해지면 삶이 얼마나 더 즐거워지겠어.
앞으로도 여전히 애처럼 굴겠지만 그래도 성숙하게 당신을 사랑해 볼게. 그러니 우리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자.
늘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