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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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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빈티지 옷을 사 입는 것을 즐긴다. 엄밀히 따지면 구제나 세컨핸드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원래 빈티지는 오래된 것들 중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있고 독특한 스토리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니까. 그렇지만 요즘은 다들 빈티지와 구제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추세이니, 나도 혼용하겠다고 미리 밝힌다.


세련되고 어른스러운 스타일도 좋지만, 지금까지 내 가슴을 뛰게 만든 옷은 대부분 레트로, 빈티지 스타일이었다. 예전부터 자연스럽고 투박한 것, 히피, 보헤미안 스타일 같은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아마 중경삼림과 같은 90년대 영화들이 일으킨 레트로 열풍에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한참 전부터 빈티지 옷을 사 입던 친구까지 옆에 둔 덕분에 자연스럽게 빈티지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예전에는 죽은 사람 옷이거나 귀신 씌인 옷일지도 모른다는 미신 때문에 꺼림칙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날 길거리 빈티지샵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발견한 뒤로 걱정은 눈 씻듯 사라졌다. 예쁜 것 앞에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후에 어느 무당이 설사 귀신이 씌었다 한들 세탁기에 돌려 버리면 안 떨어져 나가고 배기겠냐고 말한 영상을 보고는 아주 안심할 수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보기 드문 레트로한 디자인과 섬세한 디테일을 가진 빈티지 옷들에 마음을 뺏겼다. 그래서 2020년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민트초코 패턴의 민소매를 시작으로, 내 취향에 꼭 맞는 빈티지 옷들을 조금씩 사들여 왔다. 나시부터 블라우스, 폴로 셔츠, 맨투맨, 니트, 원피스, 치마, 재킷, 코트까지. 비교적 단순한 디자인을 주로 입는 바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종류의 빈티지 옷들을 사 입었다. 디자인, 재질, 가격까지 삼박자가 맞는 빈티지 옷을 발견할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샀던 빈티지 옷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빈티지 옷 특유의 매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안 사고 못 배기는 빈티지 옷들의 특징을 말해보자면 이렇다.

 

 

 

1. 좋은 재질


 

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 죽지도 않고 빈티지샵으로 돌아온 옷들은 대체로 질이 좋다. 고가 브랜드 의류가 아니더라도 박음질, 마감 처리가 잘 되어 있거나 보풀이 쉽게 일지 않는 옷들이 많다. 요즘 옷보다 옛날 옷들이 원단이 더 탄탄하다는 말이 사실인지, 금방 해지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엄마가 젊은 시절 입던 옷들을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내가 보풀 하나 없이 멀쩡하게 입고 다닐 정도니까. 덕분에 한 철만 입어도 늘어나고 해지는 인터넷 쇼핑몰 옷과 달리, 빈티지 옷은 같은 가격으로도 더 오래 입을 수 있다.

 

 

 

2. 특이한 디테일


 

빈티지 옷에서 유난히 자주 보이는 특징이자, 보는 순간 마음이 무장 해제되어 충동구매를 불러일으키는 디테일이 몇 가지 있다.


① 섬세한 자수

섬세하게 놓인 자수는 언제나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작고 섬세한 자수는 평범한 형태의 옷도 훨씬 사랑스럽게 만들고, 가볍게 히피스러운 분위기를 내기에도 좋다. 큼지막하게 들어간 자수보다는 포인트로 들어간 자수가 특히 귀엽다.


② 예쁜 단추

촘촘하게 박힌 앙증맞은 단추 또한 항상 내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 중 하나다. 영화 〈아가씨〉 속 히데코의 드레스에 달려있을 법한 자개단추는 물론이고, 평범한 단추 모양이더라도 빼곡하게 3개 이상 나열되어 있으면 옷의 디자인과 상관없이 사고 싶어진다. (대신 그만큼 단추가 크고 못생기면 치를 떤다.)


③ 화려하고 자잘한 패턴

빈티지에 한해서는 화려한 패턴이 들어간 옷도 좋아한다. 할머니 옷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놓고 레트로 스타일인 옷들. 꽃무늬도 좋고, 페이즐리도 좋다. 한때는 페이즐리 패턴 블라우스에 꽂혀 영화 〈고고70〉에나 나올 것 같은 옷을 사기도 했다. 다만 역시나 큼지막한 패턴보다는 세필붓으로 그린 듯한 자잘한 무늬를 좋아하는 편이다.

 

 

 

3. 빛바랜 색감


 

빈티지 옷은 오래된 세월 탓에 색이 바래버린 것들이 많다. 그래서 절대 새 옷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마치 필름 카메라로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오히려 좋다. 오래된 책 표지 같기도 하고. 쨍하고 선명한 새 옷보다 빛바랜 빈티지 옷을 입으면 마치 90년대 필름 영화 속 인물이 된 듯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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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특징을 지닌 빈티지 옷을 찾기 위해 웹사이트부터 인스타그램, 중고 플랫폼, 오프라인 매장까지 여러 곳을 누볐다. 쇼핑은 원래 손품, 발품을 팔아야 한다지만 빈티지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내 취향에 꼭 맞는 빈티지 옷을 운명처럼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한다. 나도 예쁘고 저렴한 구제 옷을 찾기 위해 온오프라인 곳곳을 돌아다녔다.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중 마음에 들었던 구매처 몇 곳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몇 년 사이 문 닫은 곳이 많아서 비교적 최근에 이용한 구매처, 아직 정상 운영하고 있는 매장 위주로 공유해보겠다.)

 

 

 

1. 지하철역 수입 의류 할인 매장


 

서울 지하철 역을 오가다 보면 종종 ‘수입 의류 할인 매장’이라는 현수막을 단 가게를 볼 수 있다. 이런 곳들이 바로 구제 의류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알짜배기 매장들이다. 나는 작년 여름 합정으로 출퇴근하면서 합정역 수입 의류 매장에서 여름옷들을 꽤 건졌고, 지난 겨울에는 보문 카페를 자주 오가며 보문역 매장에서 봄·가을용 옷을 여러 벌 샀다. 전부 위에서 말했던 빈티지 감성이 가득한 옷들이다. 이곳들의 장점은 무엇보다 정말 싸다는 것인데, 합정역의 경우 브랜드 없는 옷들은 5,900원, 브랜드 옷들은 9,900원이면 살 수 있었고 보문역에서는 무려 3,000원부터 구매할 수 있었다. 합정, 보문 말고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비롯해 여러 지하철역에 이런 매장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하철역에 있는 만큼 접근성도 좋으니 구제 의류에 거부감이 없고 레트로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재미 삼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2. 번개장터 빈티지슈


 

당근마켓이나 번개장터에도 빈티지 옷을 파는 업자들이 있다. 이곳도 번개장터에서 빈티지 옷을 검색했다가 알게 된 가게인데 옷 종류가 굉장히 많다. 수입 의류 할인 매장을 온라인으로 옮겨놓은 느낌이다. 마네킹에 옷을 입혀 정면으로 찍어놓은 썸네일 사진 덕분에 마음에 드는 옷을 더 빠르게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는 자수나 디테일이 예쁜 옷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가격이 통일된 수입 의류 할인 매장과 달리 옷마다 가격이 다르고, 조금 더 가격대가 높은 편이다. 물론 오프라인 빈티지샵들에 비하면 여전히 훨씬 저렴해서 마음에 드는 옷이 있다면 안 살 이유가 없다.

 

 

 

3. 마켓인유


 

2021년 빈티지샵을 한창 찾아다니던 때 발견한 곳이다. 세컨핸드 매장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현대백화점 신촌점에 입점까지 한 유명 빈티지샵이기도 하다. 대형 매장인 만큼 다양한 옷을 팔지만 나에게 이곳은 청원피스 맛집으로 각인되어 있다. 최근에는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당시 피팅룸 옆에 청원피스를 모아둔 섹션이 있었다. 예쁜 자수가 놓인 청원피스 여러 벌이 걸려있었다. 자수가 놓인 옷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데, 원단마저 청량하면서도 빈티지 느낌이 물씬 나는 데님이니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가격대는 청원피스의 경우 2, 3만 원대로 앞서 말한 가게들보다는 조금 더 높다. 그렇지만 옷 종류도 다양할뿐더러, 깔끔히 세탁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구제 의류 특유의 먼지 냄새도 덜 나며 안심하고 입을 수 있다. 성수, 서울숲 부근에만 매장이 네 곳이 있다고 하니 성수에 자주 간다면 한번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4. 세컨솔드


 

기존에 온라인에서 빈티지 옷을 사입을 때 검색하기 여간 어려웠던 게 아니다. 새 옷들은 한참 전부터 무신사, 지그재그처럼 브랜드를 한데 모은 플랫폼에서 쇼핑할 수 있었지만, 빈티지 옷들은 일일이 구글링해서 사이트를 찾아가야만 했다. 누가 빈티지 전용 플랫폼 안 만들어주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생겼다. 이제 빈티지 옷도 새 옷을 살 때처럼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쇼핑할 수 있다. 쇼핑몰, 브랜드별로 살펴볼 수 있고 색상, 소재, 패턴별 검색도 가능하다. 고가, 유명 브랜드 빈티지부터 일본, 모리걸 스타일 의류까지 모든 성별, 취향을 아우르는 옷들을 앱 하나로 살펴볼 수 있는 만큼, 빈티지에 관심이 생겼다면 한번쯤 이용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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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조금 연다면 빈티지는 참 좋은 선택지다. 환경 친화적이고, (비싼 명품 빈티지를 찾지 않는다면) 돈도 아끼면서 질 좋고 개성 있는 옷을 입을 수 있다. 히피룩이나 레트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빈티지 쇼핑이 취향에 맞는 옷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무난하고 깔끔한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어도 괜찮다. 주인이 자신의 패션 취향을 한껏 반영해 둔 셀렉샵이 아니라면 기본적인 디자인의 빈티지 옷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 또한 위에서 언급한 가게들에서 무난한 디자인의 민소매를 몇 벌 샀다. 이런 가게들에서 빈티지를 처음 시도해볼 생각이라면, 개인적으로 겨울옷보다는 여름옷이나 봄·가을옷부터 사보는 것을 추천한다. 니트나 코트 같은 겨울옷은 보풀이 금방 일기 십상이라 질 좋고 취향에 맞는 옷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반면 여름과 봄·가을옷은 겨울옷보다는 보풀이 덜 이는 재질로 된 경우가 많거니와, 디자인이 조금 화려하거나 복고풍이더라도 촌스럽다기보다 경쾌하고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올여름이 가기 전에 빈티지샵에 한번 방문해보시라. 단 한 벌 뿐인 내 취향의 아이템을 마주치는 재미에 빠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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