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갤러리 ‘맷멀’에서 열린 아트인사이트 제1회 기획전 <틔움>을 관람했다.
감상 후기를 남기기 앞서서 먼저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시간 속에 모든 것은 휩쓸려만 가는데 우리의 시선이 닿는 곳은 극히 드물다. 고속도로의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여기에 와봤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가는 풍경을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을까?
놓쳤다고 해야 할지 지나갔다고 해야 할지 모를, 기록되지 않은 기억과 감정과 공상이 다섯 작가들의 손에 의해 태어나있었다.
그들이 시간을 붙박아준 덕에 나는 뒤늦게나마 지나간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작가 ‘대성’은 사회 이슈를 우화적으로 접근한다. 귀여운 일러스트 속에 사회의 단면을 압축한 상징성 있는 캐릭터들이 숨 쉬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사회 구조를 비판하는 방식이었다. 강하고 사실적인 언어보다도 서사가 주는 울림이 훨씬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문학과 예술이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위선과 부조리로 가득한 현대 사회를 꼬집으면서도, 그럼에도 끝은 희망이라는 작가의 신념이 그의 명랑한 화풍에서 드러났다. 이따금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그 속의 사람들을 동물이나 캐릭터로 빗대어 봐야겠다. 그렇게 하면 문제가 오히려 직관적으로 다가오면서도, 조금은 덜 끔찍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작가 ‘Mia’는 고요한 수면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던 야광의 감정들을 그림책에 담아냈다. 이유 없이 떨어지는 눈물로 뺨을 젹셔본 사람들이라면 그의 그림에서 오는 알 수 없는 슬픔을 더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The blue: bench 벤치, 슬픔에 관하여'는 양쪽 책장을 자유롭게 펼쳐 새로운 장면을 구성할 수 있는 프렌치도어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나를 둘러쌌던, 기억나지 않는 세상이 불쑥 나를 마주했다. 내가 펼친 장은 ‘손짓한다, 꿈속에서’라는 문장을 만들어냈다.
일상은 자주 아름답고 꿈만 같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이 마음을 아려오기도 한다. 작가는 말한다. 꿈이 아니라고, 이렇게든 저렇게든 존재하니 괜찮은 거라고.
작가 ‘유사사’의 그림은 아주 구체적인 묘사들이 나열되는 사실주의 문학 같았다. 어떤 찰나를 구성하는 크고 작은 요소들이 촘촘히, 겹겹이 채워져 있다.
언젠가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나무가 저 멀리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놀라움에 사진을 찍으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런데 관광객인지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이 셔터를 누르려고 할 때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것이다. 결국은 사진을 찍지 못하고 아련한 형체만 남아 답답한 채로 잠에서 깨었다.
작가의 그림은 짙은 안개 속을 섬세한 바늘로 갈라 수 놓는 듯했고, 나는 그것이 참 부러웠다.
작가 ‘나른’은 사랑이 만드는 공간의 질감, 특히 연인 사이의 예민한 몸의 언어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연애하면서 가지게 되는 - 타오르거나 꺼져버리는, 평범하지만 특수한, 달콤하다가도 쓰라린 - 순간들을 포착했다.
그런 순간이 있다. 뭔가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 같아서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가, 문득 다시 보고 싶어서 돌아보게 될 때. 돌아봤을 땐 이미 사라졌다. 작가의 그림들은 꼭 그런 순간을 붙잡아 놓은 것 같았다. 모르는 연인의 방을 훔쳐보는 듯해 고개를 돌렸다가, 그곳의 익숙함을 느끼고 그 순간에 나를 들여놓게 된다.
그렇게 맨발로 들어간 그들의 방에서, 사랑이 주는 간질간질하고 내밀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작가 ‘은유’는 자신을 압도하는 내면세계를 대자연에 빗대어 표현한다. 그늘진 과거의 상처를 담은 몸은 깊은 바다로 잠식한다. 우울 속으로 깊이 잠겨 들어간다. 암흑 속으로 깊게, 더 깊게 들어갈 때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은 몸에 비해 내면세계는 무한히 광대하다. 나를 뒤덮고, 집어삼키고, 점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껴안고, 자유로이 날려 보내고, 빛을 쬐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화자는 사막에서 선인장을 만난다. 가시가 날카롭게 돋아 서로를 찌르는 선인장들이 우람하게 서 있다. 그는 어찌해야할지 모른다. 기어코 만져 상처를 낼 것인가, 다시 도피할 것인가.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내면의 성장 서사는 인생에서 마주하는 무력감과 방황을 효과적으로 전시한다. 공간이 너무 광활하면 방향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걷고, 별을 바라보고, 뜨는 해에 인사할 수 있다.
아트인사이트 제1회 기획전 <틔움>을 통해 안개 낀 우주 속의 먼지와도 같은 기억을 손에 잠깐 쥐었다. 예술은 복잡한 삶 속의 작은 희망을 섬세히 틔운다. 다섯 아티스트들의 다음 작품 활동과 아트인사이트의 다음 기획전이 기대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