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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영화는 베르트와 마네 간의 관계를 이성적인 관점에만 치중해 표현했기 때문에 정작 베르트의 작품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화에서 마네는 그녀에게 언니를 그리고, 인생을 그리라는 말을 건넨다. 이 장면 후, 베르트는 <요람>을 완성해 살롱전에 출품하고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영화의 이 같은 연출은 <요람>이 마네의 조언 덕분에 탄생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는 베르트의 작품을 독립적인 예술적 성취로 보지 않고, 남성 화가의 손길이 닿아야 완성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그렇지만, 실제로 <요람>은 베르트 모리조가 자신의 시선과 감각으로 창조한 작품이다. 그녀는 단순한 모성의 이상향을 그리지 않았다. 그녀가 본 것은, 젊은 시절 예술의 열정을 함께 나누었던 언니가 아이를 낳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요람> 속의 여성은 평온하지만, 동시에 권태로워 보인다. 이 그림은 이상화된 가정의 서사가 아니라, 여성의 선택과 삶의 무게를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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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베르트는 자신의 작품이 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 그러나 당시의 평론들은 <요람>을 가정적인 여성상을 이상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과연 베르트가 이 같은 해석에 순수한 기쁨을 느꼈을까? 당시 평론가들은 평화로운 실내 공간 속에서 아이와 교감하며 아주 정숙하고 고요한 삶을 아주 평화롭게 살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이라는 면에서 좋은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베르트는 그녀의 언니가 아기를 낳고 양육에 매진하면서 젊은 시절 자신과 함께 예술에 매진하던 꿈은 잃어버리고 어머니이자 가정주부로서 굉장히 권태로워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런 언니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요람>을 그렸다.


자신의 꿈은 잊어버리고 현실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굉장히 수동적이고 권태로움을 느끼는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위와 같은 남성 평론가들의 평론을 들었을 때 베르트는 과연 호평을 받았다는 것 만으로 마냥 해맑게 웃을 수 있었을까? 영화는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그림을 완성했으며, 작품에 대한 남성 평론가들의 시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탐색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모델이 된 화가, 수동적 존재로 그려지다


 

영화에서 마네와 베르트의 관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는, 베르트가 "어둠에 생명을 불어넣지 못하겠다"며 마네에게 그림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마네는 그녀의 고민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고뇌하는 베르트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려 한다. 이에 베르트는 "그게 당신의 대답이냐? 나도 뭔가 해내고 싶다"며 분노한다. 이 장면은 마네가 베르트를 동등한 예술가로 보기보다 ‘모델’로서만 인식하고 있음을 강하게 드러낸다. 실제로 마네가 그녀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마네가 베르트를 독립적인 화가가 아닌 자신의 뮤즈로 여겼음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이는 결국 연출자의 베르트에 대한 해석이라 볼 수 있다. 더욱이, 이 장면에서 베르트가 흑색이 살아 있으면 좋겠다고 요청하자, 마네는 그녀의 작품에 직접 개입해 상아흑색을 사용할 것을 권한다. 이는 단순한 예술적 조언처럼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베르트의 창작 과정이 마네의 개입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는 인식을 조장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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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베르트가 화를 내며 자신의 작품을 들고 돌아가자, 다음 장면에서 마네는 그녀의 아틀리에를 직접 찾아와 흑색 드레스 표현을 도와준다. 그러나 마네는 곧 "당신이 빚진 거야"라며 또 다른 작품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요구한다. 결국, 베르트는 다시 마네의 모델이 되고, 마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그의 손길에도 적극적으로 반응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받아들이는 존재로 연출된다. 비록 모델이 된 순간 움직임이 제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출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남성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고, 만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이는 명백히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을 사물화하고 대상화하는 ‘남성적 응시(male gaze)’의 영향을 보여준다. 요컨대, 영화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베르트를 예술의 창조자가 아닌, 위대한 거장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뮤즈로 그려낸다.


 

 

우리는 마네의 뮤즈가 아니라, 베르트 모리조를 봐야 한다


 

요약하자면, 영화 <마네의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는 제목 그대로 그녀를 주체적인 화가가 아니라 마네의 여인으로 바라본다. 베르트 모리조의 예술적 여정을 조명하기를 기대했던 관객에게 이 영화는 실망을 안긴다. 제목에서부터 베르트는 ‘마네의 것’으로 규정되었고, 영화 속에서도 마네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녀를 그려낸다. 두 예술가의 교류보다는 화가와 뮤즈,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도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여성을 주제로 한 콘텐츠는 늘 딜레마를 안고 있다. 잊혀졌던 여성 예술가를 조명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성의 시선에서 그녀들을 해석하는 위험을 내포한다. 이 영화는 마네를 독립적인 화가로 그리는 반면, 베르트 모리조는 마네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처럼 묘사한다. 이는 전형적인 성 이데올로기적 관점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베르트 모리조를 마네의 여인이 아니라, 독립적인 화가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녀는 단순한 뮤즈가 아니라, 인상주의의 한 축을 형성한 예술가였다. 그러므로 그녀를 논할 때, ‘마네의 제비꽃 여인’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그저 ‘베르트 모리조’라는 이름 하나로 충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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