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이 아는 토끼 캐릭터 ‘미피’가 올해 70주년을 맞았다.
문득 70년이라는 그 구체적인 세월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져, '내가 언제 처음 미피를 알게 됐더라?'를 떠올려 보게 되었다. 결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유아용 장난감, 연필, 공책, 도시락통 등 미피는 모든 인생의 시기에 내가 겪었던 일상의 너무 많은 곳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 캐릭터의 ‘초기’라는 것을 가늠해보기가 어려웠다.
미피 70주년 기념전, '미피와 마법 우체통' 전시장에 가 보니, 나보다 20년 이상 늦게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 토끼 미피 만큼이나 작고 아장아장 걷는 어린 아이들이 가족의 손을 잡고 익숙한 캐릭터들을 알은체하며 전시를 관람하는 모습이 곳곳에 있었다. 손수건, 신발 등 미피가 그려진 생활 용품들과 함께였다. 아마 이들도 어른이 되면 자신이 언제부터 미피를 가까운 곳에서 보아 왔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미피가 그처럼 시대를 뛰어넘은 캐릭터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전시실에 들어가자마자 느낀 건 전시가 구현하는 세계의 모습과,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 어른을 주된 타겟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미피의 교실을 재현해 놓은 공간에서 다 같이 앉아 덧셈, 뺄셈을 배우고, 스크린 속 미피의 옷을 잠옷과 수영복 등으로 갈아입혀 주거나, 땅과 초록 덤불 모양 판넬을 세워 구현한 ‘당근밭’ 속에서 역시 종이로 된 모형 당근을 뽑아 들어 보는 것 등의 코너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를 함께 보러 간 건 역시 어른인 두 명의 지인이었고, 결국 ‘어른 셋’이서 전시를 관람한 셋이다.
하지만 어른 셋이 전시를 같이 보러 가서도 여전히 다정함과 즐거움을 느낀 이유는, 미피 캐릭터의 가장 본질적 특징이 ‘단순함’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피 캐릭터의 생김새만 보아도, 검은 선으로 길쭉한 귀와 동그란 얼굴만을 표현한 윤곽에, 역시도 단순한 선 몇 개로 표현된 눈과 입은 미피가 토끼라는 것을 알려주는 ‘최소한의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미피의 옷을 포함해 모든 자연물과 사물 역시 기본 도형을 큼직하게 조합하여 만든 형태이로, 모두 평면이여 단색이다. 실제로 미피 동화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학부모들이 구매를 망설인 건 ‘너무 단순해서’ 였다는 내용이 전시 중간에 나와 있는데,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 단순함은 미피의 작가 딕 브루너가 철저히 의도해 구현한 것이다. 그는 함축성을 토대로 소재의 본질만 남긴 채, 나머지는 상상으로 채울 공간으로 구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아이들이 상상력으로 채워가는 세상’이었다. 이 단순함에 도달하기 위해 딕 브루너는 오히려 정교한 집중력을 들여 오랜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냈으며, 그가 쓰는 색도 일명 ‘딕 브루너 컬러’라고 부르는 여섯 가지 색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 치열한 노력의 결과로 미피는 아이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모습으로 다가가, 개개인의 가장 특수한 경험들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미피는 아이들에게 가족, 친구와의 관계에 녹아든 따뜻함과 상실의 아픔, 양심의 가책 등 중요한 삶의 가치들을 풍부하게 인지할 수 있게 해주었고, 1997년 미피 시리즈 중 하나인 <사랑하는 할머니>는 네덜란드 최고의 그림책 상인 ‘실버 슬레이트 상’을 수상했다. 전시의 후반부에 작가의 작업 과정과 실제 작업물을 배치함으로써 미피의 정체성과, 그에 담긴 깊은 의도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전시 역시 그 관람과 체험 방법이 단순하다. 평면의 판넬로 구현된 미피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미피와 함께 요리하고, 학교 가고, 친구에게 전화 걸며 별거 아닌 행위들을 행하고 공유하는 것 등이 대다수이다. 타겟 연령층이 낮기 때문에 택한 단순함일 수도 있으나, 원래 미피를 향유하는 방식이자, 사람들이 미피에게 애정을 느끼는 이유가 전시의 과람 형태에도 구현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관람 이후 미피 전시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를 고민하던 중,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미피의 표정 인식에 대한 부분이다. 똑같은 표정으로 그려진 미피들이었지만, 나는 미피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따라 자연스레 ‘미피가 시무룩하다’, ‘슬프다’, ‘설레는 표정으로 기다린다’ 등, 표정을 묘사하는 서로 다른 수식어를 내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 무의식중에 미피와 비슷한 나의 어린 시절의 경험, 그 안에 녹아있는 감정들을 그림에 비추어 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개인적 경험의 적극적 개입을 더 분명히 느낌 순간이 미피의 친구 보리스가 산에서 나무를 가져오는 애니메이션 장면을 볼 때였다. 아마 영상 속 그려진 산은 미피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산일 텐데도, 나는 그런 것에 대한 고려 없이 무의식중에 배경을 ‘한국의 산’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캠핑을 가서 봤던 한국의 산에서 나는 새벽 냄새를 떠올리고 있었다. 작가가 의도한 상상력이 나에게도 발현되고 있던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전시 내내 별것 아닌 행동에도, 미피는 전혀 귀여우려고 의도하지 않는 행동에도 끊임없이 귀엽움과 따뜻함을 느꼈던 이유는, 그와 연관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아기자기한 사랑스러움들을 느끼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미피 전시에서 귀엽다고 느낀 것들을 나열하다 한 차례 지웠다. ‘보리스가 양치하고 세수하는 모습’, ‘미피가 기차를 타고 흘러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 ‘미피가 교실에서 리코더를 연주하는 모습’ 등 적어 놓고 나면 왜 특별한지 전혀 모르겠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오랜 기억들을 다섯 살 흰 토끼의 시선이라는 앙증맞은 필터를 장착하고 돌아보면서 그 안에서 사랑스러움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성인이 되어 미피 전시를 보면서 얻어 온 중요한 경험이 아닌가 싶다.
미피 전시의 마지막 부분은 미피가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모습으로 끝난다. 마치 미피 전시에서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처럼. 역시 귀엽다. 그게 전시를 보는 이 순간에도 사랑스러울 만한 다양한 요소들이 여기저기 녹아있기 때문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