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들어서면, 텅 빈 무대 위에는 객석을 바라보고 있는 빈 의자 하나가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객석 쪽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이 밝아진다.
퍼포머는 무대로 등장해 의자의 방향을 객석의 관객과 등지도록 돌려놓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관객에게서 등을 돌리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
퍼포머
저는 21년도부터 대학원에서 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학교 내부와 외부 프로덕션에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아, 내가 드디어 연극을 하다니.
어렸을 때부터 늘 꿈꿔오던 거였어요.
자기소개가 필요한 자리에서, ‘저는 연극해요.’ 하면, 사람들이 꼭 물어봅니다.
“우와, 멋있다. 근데 그럼 연극에서 무슨 일 하시는 거에요? 배우? 연출? 아니면 글 쓰세요?”
“드라마터그요.” 그리곤, 짧은 정적.
“아, 근데...... 그게 뭐 하는 거에요?”
드라마터그. 존재는 생소하지만, 사실 어제오늘 생겨난 건 아니고요, 18세기 독일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오래전에 생겨났죠. 그때부터 세계 곳곳에서 쭉 있어왔던 역할입니다. 저는 드라마터그가 하는 일을 보통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술감독이나 연출이 배의 선장이라면, 그 옆에서 지도를 봐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러니까, 먼저, 선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극단 전체나 단일 프로덕션의 목표를 명확히 설정합니다. 그리고 목표에 맞게 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창작과 제작의 거의 전 과정을 내부 비평가의 눈으로 모니터링하는 거죠.
일단 목표가 설정되고 나면, 레퍼토리를 선정하고, 희곡을 집필하고, 디자이너들과 구체적인 공연화를 논하고, 배우들과 연습하고, 마침내 공연이 무대에 올라가는 그 모든 과정에 관여합니다. 아, 과거에 이미 쓰여진 희곡을 공연하는 경우에는, 희곡을 심층 분석하고, 이 작품이 오늘날 어떤 의의를 가질 지 찾는 작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과정을 모니터링한다고 표현했지만, 당연히 그냥 단순히 지켜보는 건 아니고요. 상황에 맞게 필요한 자료를 리서치해서 제공하기도 하고, 배우들과 디자이너를 포함한 프로덕션 전체가 작품을 함께 이해하고 있도록 돕습니다. 지금 연습하면서 만들고 있는 장면이 관객의 입장에서 어떻게 읽힐지, 어떤 요소를 더 재미있게 응용해보면 좋을지 활발하게 아이디어를 내기도 합니다.
처음 공연 회의가 이루어지는 테이블부터 연습실까지, 저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공연이 올라가면, 객석에서 여러분과 같은 방향으로, 무대를 보면서 이렇게 앉아 있습니다. 주로 맨 끝줄 구석에요.
혹시, 스페인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맨 끝줄 소년>이라는 작품을 아시나요? 그 작품에서는, 맨 끝줄 자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무도 거기를 못 보지만 거기서는 모두를 볼 수 있기에 가장 좋은 자리라고.
맞아요.
배우분들과 여러분은 제가 극장 어디에 있는지 못 보지만, 저는 공연이 전반적으로 어떻게 올라가는지, 큰 그림을 다 봐야 하기 때문에 항상 맨 끝줄의 드라마터그가 되어 있습니다.
설명이 진짜 길죠, 근데 어떤 드라마터그한테 물어봐도, 드라마터그가 뭐 하는지 딱 명쾌하게 대답 못할 것이고요, 아마 서로 다 다르게 말할 거에요. 저는 사람들이 하도 물어보니까 설명하기 귀찮아서 처음부터 ‘그냥 연극 쪽에서 일해요’라고 얼버무리기도 해요.
이 공연 하려고 드라마터그의 어원이 뭔지 구글링해 봤거든요, 'Drama'에 ‘-ourgia’가 합쳐진 말이라고 합니다. Drama는 예상하시다시피 여러분이 자주 보시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행동하면서 펼쳐내는 연극 작품 그 자체고요. ‘-ourgia’는 무언가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일한다는 뜻의 그리스어 접미사래요. 네, 그러니까 그 두 개를 합치면 원래부터가 그런 뜻이더라고요.
‘연극 쪽에서 일하는 사람.’
이름 자체가 생소하다 보니까, 제 역할이 진짜 다양한 이름으로 잘못 불리기도 하거든요? 누가 그렇게 물어보더라고요. ‘드라마터’가 뭐야? 근데 드라마랑 영어 단어 '매터 (matter)'를 합친 것 같아서 좋아하기로 했어요. 드라마를 뭔가 중요하게, 문제적으로 만드는 사람 같잖아요.
또 ‘드라마터그’ 할 때 ‘터그’가 turg인데요, 독일어에서 왔어요, 'tug' 터그라고 잘못 쓰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 'Tug'가 영어로 '당기다'라는 의미니까, 꼭 드라마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 같잖아요.
이걸 제 프로덕션 사람들한테 말하면, ‘역시 네가 드라마터그다'해요.
제 방식대로라면 진짜 이게 드라마터그 맞는 것도 같아요. 연극을 만들 때, 어떤 실수나 시도에서도 재미있게, 의미 있게 확장될 가능성을 찾는 사람.
미국의 드라마터그 버트 카르둘로는 그렇게 말했대요. 드라마터그는 자동차 정비공이라고. 자동차라는 결과물을 제 손으로 뚝딱뚝딱 만든 건 아니지만, 자동차의 작동 원리를 다 공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 말도 와 닿아요. 제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인물들이 겪는 희노애락을 안 겪어본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프로덕션에서 작품을 깊게 분석하고 이해해야 하는 역할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드라마터그를 잘 모르시는 이유는, 드라마터그라는 역할이 있을 때보다는 없을 때 티가 나는 역할이라 그럴 거에요. 작품 보면서, '와 저거 드라마터그가 꼭 있겠구나' 하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근데 '와 저거 드라마터그가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없을 거다' 하는 경우는 꽤 있어요. 작품이 길을 잃은 게 너무 느껴질 때요. 어느 순간 주제가 사라지고 장면 장면의 이음새가 심하게 삐걱거리는 게 보일 때요. 그럴 때 진짜 프로그램 북을 보면, 드라마터그가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럼 그제야 아 드라마터그가 중요했구나. 박수를 보내게 되는 거에요.
하지만 뒤늦은 박수여서, 그 자리에 박수를 받을 드라마터그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박수는 닿을 수 없어요.
언젠가 일이 너무 지난할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떠들썩한 환호나 특별대우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내가 연습실이나 극장에 안 가면, 내가 없다는 거, 그 정도는 알아줬으면 좋겠다. 과연 알아줄까? 근데 진짜 그렇더라고요, 알더라고요. 이제는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들은 내 수고로움에 박수를 보낸다. 근데 내가 없을 때 보내니까, 그 소리가 나한테 닿지 못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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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머는 일어서서 의자를 객석 쪽으로 돌린다.
관객에게 얼굴을 드러내고, 관객 한 명, 한 명을 찬찬히 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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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셨죠, 제가 뒤돌아서 말하니까. 저도 이렇게 있으니까 여러분이 너무 궁금했어요. 무대에 서려니 좀 부끄러운 탓도 있었고요, 사실은, 공연을 보러 오시는 관객분들이, 배우나 연출가들 얼굴을 으레 궁금해하듯이, 한 번쯤은 제 얼굴도 궁금해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장난 한번 쳐 본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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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 쪽 조명이 들어온다. 관객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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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어진 시간이 거의 다 끝나 가요. 저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길 수는 없거든요. 프로그램북에 실린 '드라마터그의 글' 세 페이지를 다 읽는 데 걸리는 시간 만큼이랄까요.
제가 아까 설명을 다 못했는데, 드라마터그가 하는 일 중 진짜 중요한 게 하나가 더 있거든요. 바로 관객 한 분, 한 분의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는 거에요. 그래야 프로덕션의 목표가 객석에 잘 전달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그걸 토대로 더 발전할 수 있거든요.
객석에 한 명의 관객으로 앉아 있으면, 어둠속 희미한 수많은 군중 속 하나가 되어, 가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누가 알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여러분 한분 한분이 기뻤는지, 슬펐는지, 힘들었는지, 홀가분했는지, 화가 났는지,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너무 중요하고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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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머, 말을 마치고 무대에서 객석 맨 끝줄로 이동한다. 맬 끝줄 가장 구석 자리 빈 객석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