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을 보고 왔다. 예고편도 시놉시스도 보지 않고 곧바로 향한 극장. 기생충의 여파로 들뜬 마음 그러나 SF물을 좋아하지 않는 취향이 균형을 이루어 나름의 평형상태를 유지하며 2시간 17분을 집중했다.
멀쩡히 잘 살아가고 있는 행성에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외부인 주제에 원주민들을 '크리퍼'라 이름 붙이고. 무자비하게 학살하려 드는 마샬을 보며 나샤가 울부짖는 부분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탄압했던 미국을 연상시킨다. 백인 유전자를 우월하다고 여기고, 크리퍼들에게 가스를 살포하여 밀어버리라고 지시하는 장면은 유대인 학살을 떠올리게 만든다. 소스에 집착하는 일파와 말 한마디 한마디 아내에게 허락받는 무능하지만 목소리 큰 마샬. 재밌는 캐릭터의 설정들은 정치인, 정확히는 독재자를 더 독재자답게 만들어 현실과의 경계를 과감히 허문다. 뒤이어 등장하는 약물 거래, 동성애, 젠더 등 아주 다양하고 현실적인 소재들은 우리 관객들의 뇌에 천천히 쌓인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미키, 그리고 죽는 것이 그의 직업이라 외치는 마샬을 보며 틀린 말은 아니지- 라고 생각했던 나는. 마샬이 종족 번식을 강요하자 제가 자궁으로 보이세요? 라고 반문하는 카이의 눈동자를 보며 반성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부품처럼 소모되고 대체되는 현대인들을 상징하는 미키 1,2,3....17.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에 스스로 자원했고, 꼼꼼히 서류를 읽어보았느냐는 질문도 두 번이나 받았고. 문제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잠시 했으나. 그런 생각조차 이미 자본주의에 찌든 생각이다. 인간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아이디어 그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미 인간이 숫자로 취급되고 있는 세상이지만, '익스펜더블' (일회용,소모품) 이라는 직업의 등장은 인간을 물건처럼 사용하는 것을 더 이상 숨길 의지조차 없음을 의미하니 말이다.
익스펜더블을 가능케 하는 현대 기술, 휴먼 프린팅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기억은 모두 보존한 채, 죽어있는 몸만 재출력하여 생을 연명한다. (연명이라는 단어가 맞는 말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당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 그리고 아빠를 생각하면 휴먼 프린팅 기술이 좋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예상되는 엄마의 답변, 죽음이 있어야 삶이 기쁜 거야! 라는 말은 어쩌면 '인간'을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죽지 않는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냐. 인간의 존엄성이란.. 한 번만 죽을 수 있을 때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휴먼 프린팅으로 다시 복구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에어팟을 잃어버려도, 공장에서 나온 똑같은 에어팟을 구매하면 되니까 에어팟의 존엄성은 없는 것처럼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티모가 살아있는 미키를 발견했음에도, 어차피 다시 태어날 거니 내버려두고 떠났던 것처럼 말이다. 같은 맥락으로, 미키는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라고 묻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이 원하는 답변을 해주지 못한다. 그가 겪은 죽음은 인간이 겪도록 주어진 진짜 죽음이 아니니까.
그리고 발생한 멀티플 상황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우리들로 하여금 '나'에 대한 탐구를 더욱 촉발한다. 미키는 17번을 죽었다. 프린팅될 때마다 조금씩 달랐던 수많은 미키들. 그중에서도 미키 17과 미키 18는 정말 다르다. 분명 같은 사람이어야 할 텐데,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데, 확연히 다른 성격 그리고 다른 두 존재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누가 진짜 미키일까? 라는 질문. 그러고 또다시 당연히 뒤따라 오는 답변. 둘 다 미키이다. 오늘 나는 연어 포케로 끝내주는 점심을 먹을 작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순대국밥을 먹었다. 어제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잔뜩 있었으나, 오늘은 혼자 사는 미래를 그린다. 초등학생 때는 너무 소극적이라 남들 앞에 서기 무서워했지만, 작년 축제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연을 했다. 너무 달라 보이는 '나'들이지만 결국 다 '나'이다. 어쩌면 '나'라는 것은 고유한 영혼과 실체의 결합품이 아닌, 그저 상태에 불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키 열 일곱 명이 보여준 잠재된 수많은 가능성과 순간들은, 자본주의 속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해 버린 '나'를 노동의 소외에서 구출해 낼 수 있는 열쇠를 쥐여준다.
그리고 그 열쇠를 쥐고 탈출하는 방법 또한 영화에 정확히 명시되어 있다. 여기 나샤를 보자. 미키 열 일곱 명을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해 주었다. 심지어는 미키 17 본인도 이해하지 못한 미키 18 본인을. 나샤는 그저 미키이기에 미키보다 미키를 더 이해하고, 껴안아 주었다. 둘 중 한 명을 달라는 카이의 제안에 둘 다 나의 미키라며 불같이 화를 내는 나샤는. 미키 17과 18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미키라는 것을 단단히 알고 느끼고 있다. 나샤가 보여준 거대한 사랑, 본인보다도 더 본인을 이해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랑. 이것이야말로 우리 현대 사회에서 타인과 그리고 자신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형태가 아닐까.
인간의 존엄성. 어쩌면 현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을 외치고 있으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한정된 스크린 타임과 스토리 라인 속에 넣기 위해서는 무게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결국 무겁게 남은 것은 없었다. 가볍게 던져준 것들을 우리 관객들이 다시금 무겁게 해서 가져가야 할 것들만이 있었다. 그 소화 과정이 영화 러닝 타임 속에서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듯 느껴졌다.
미키 반스라는 무기력하고 맹한 캐릭터가 매력적이었으나 '죄책감'이 핵심 감정으로 자리 잡는 그 과정, 설득 구조 자체가 약했다. 핵심 인물처럼 나오는 듯 했던 카이의 역할도 미적지근했고, 티모 또한 친구라는 좋은 포지션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치도록 만들었다. 마샬이 죽고, 일파가 죽어서 평화가 찾아오고. 나샬이 위원회에 출마하여 휴먼 프린팅을 폐지하며 단단히 닫아주는 해피엔딩은. 전형적인 권선징악처럼 느껴졌다. 절대적 악인으로 묘사되는 마샬과 일파. 사람을 살려주고 환대하는 착한 크리퍼. 이분법적인 선악 구조는 지금껏 잔뜩 뿌려놓은 수많은 풍자를 모두 세련되지 않게 만들며. 생각들이 잔뜩 앞으로 달려 나가다 갑자기 마구 뒷걸음칠 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분명 이러한 구조에 안정감을 느끼고, 지친 마음에 위로를 받아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모르겠다. '인간의 존엄성'을,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싶었다면. '죽음' 그리고 '선과 악의 경계'를 좀 더 조심스럽게 다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딘가 모르게 섹시하지 못한, 세련되지 못한 영화였다는 아쉬움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