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극장'이란 공간을 새롭게 정의하는 말이 SNS상에서 소소하게 유행하고 있다. 바로 '극장은 이제 시네필만이 모이는 공간이다' 이다.
지난 24년 12월 11일 개봉한 해외 예술 영화 '서브스턴스'가 5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신기록을 세웠다. 이는 11년 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관객 수 40만 명을 돌파한 이후 처음이다. 또한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 에드워드 버거 감독의 '콘클라베' 등 상업성보단 감독의 사유가 짙게 묻어나는 영화들이 박스오피스를 석권하는 중이다.
'서브스턴스', '콘클라베' 등 한국 영화계에서 다소 주목받지 못하던 해외 예술 영화들이 이와 같은 기록을 세우는 건 굉장히 유의미한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 때문인지 대형 극장들은 '캐롤', '원더' 등 명작으로 불리우던 영화를 재개봉하고, 영화 굿즈나 특전을 기획하는 등 관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 여러 노력을 가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극장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쉬는 날 사랑하는 가족 혹은 연인과 극장에 가는 것이 하나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고, 이에 따라 DVD방과 작은 영화관 등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필자가 경험한 극장은 과거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관객이 없어 영화관을 대여한 것처럼 관람을 한 적도 있었고,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 눅눅해진 팝콘을 먹은 적도 있었다. 삭막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극장은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그 이유로는 고물가 시대로 인한 티켓 값의 변동과 OTT 서비스의 발달을 꼽을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한국 영화 산업 결산' 자료에 따르면 24년 영화관 누적 관객은 1억 2313만 명으로 23년 대비 1.6% 감소한 수치를 보여줬다. 이는 17년~ 19년 평균의 55.7%의 수준이다. 즉, 재생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개봉하는 영화의 대부분을 볼 수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더 이상 예전만큼 극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을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다시 도래한 시대'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란 영화 산업의 시초가 되는 기술이다.
영화의 발전은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최초의 영사기를 뜻하는 '시네마토그라프'이다. 시네마토그라프는 촬영 카메라와 영상 메커니즘이 일체화된 기기다.
뤼미에르 형제는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 등의 제목을 붙인 영상물을 촬영하여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관람료 1프랑을 받고 상영했다.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의 경우 스크린을 향해 달려드는 열차의 모습에 놀란 관객들이 카페 밖으로 도망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시네마토그라프는 최초의 극장이라는 의의를 지니지만, 실제 상황을 그대로 촬영했을 뿐 스토리텔링적인 가치가 부족하여 다큐멘터리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여기서 '시네마토그라프'의 '시네마'는 영화를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1889년, 에디슨은 '키네토스코프'라는 기기를 발명한다. 키네토스코프는 12.2M의 필름을 자동장치로 회전시켜 아래에 있는 전구의 빛을 위에서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도록 한 기기이다. 이 기기는 비디오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영화적 영사기의 기초를 제시했으며, 보통 20~30초 정도의 권투, 키스, 스트립쇼 장면 등 자극적인 내용을 담았다.
시네마토그라프와 다르게 키네토스코프는 모두가 함께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각각의 키네토스코프의 렌즈를 들여다보았다. 즉, 넓게는 각각의 휴대 기기에 상영되는 영상을 시청하는 OTT 서비스, 좁게는 현재의 증강·가상 현실 등을 보여주는 AR 기기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란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발전한 두 기술은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가 우위를 차지했다. 시네마토그라프와 다르게 키네토스코프는 기기는 이동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영화관의 개념이 확대되며 시네마토그라프 기술이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개인의 공간이 중요해진 요즈음, 키네토스코프 기술이 그 뒤를 바짝 따라오는 중이다.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다시 도래한 시대 속, 우리의 극장은 어떻게 될까. 잠시 잊혀졌던 키네토스코프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인가.
필자는 단호하게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술은 혼자서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은 편집자가 함께 붙어 글을 탈고해야 하고, 미술은 작품을 배치하는 큐레이터가 함께 있어야 하며, 종합 예술인 영화 또한 각본·촬영·편집 등 많은 이들의 노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많은 인력과 시간을 투자하여 예술작품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유를 보다 많은 이들과 향유하고자 함일 것이다. 극장이란 장소는 이러한 향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관객은 각각의 객석에 앉아 울고 웃으며 작품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공유한다.
이것이 바로 개인주의로 변주하는 키네토스코프 시대의 극장이 가질 수 있는 힘이다. 그 간곡한 호소를 잊지 않는 한, 극장의 종말은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