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우리 엄마의 취미는 껌 씹기다. 정확히 말해서는 단물이 다 빠져 어금니 모양처럼 변한 껌을 입 안에 넣고 지긋이 씹는 것이다. 가끔 안방에 들어가면 집안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침대에 껌처럼 붙어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가끔 껌이 얇아지도록 씹는 우리 엄마의 모습을 보며, 엄마가 인내심이 참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단물이 빨려 고무 맛이 나는 껌을 계속해서 씹는 것은 소수만이 할 수 있는 퍽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 엄마는 광시면 은사리 깊은 골의 3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셨다. 엄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 굉장한 엘리트였다고 한다. 카투사 출신인 데다 서울 대학교에 붙으셨으나, 워낙 깊은 시골이다 보니 합격 결과를 늦게 알아 아쉽게도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하셨다. 게다가 그 시대에 직접 도면을 그려 소유지인 산에 커다랗게 과수원을 만드시기도 했다.

 

물론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와 함께 과수원 일만 하신 것이 아니다. 논농사, 밭농사, 그리고 꽃나무에 꽃을 잘 피우기 위해 꿀벌 양봉까지 하셨다. 농사를 위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일 센 농약을 뿌렸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두 분 다 농약을 희석하기 위해 설탕물을 벌컥벌컥 마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엄마가 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외할머니가 앓아누우시고 만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아프시지 않으셨던 분인데, 한 번 병상에 눕고 나니 쉽게 일어나시지를 못하셨다. 너무 어렸던 우리 엄마는 배도 고프고 심심하니 외할머니가 누워 계신 방까지 기어가 외할머니 배에서 자주 놀았다고 한다. 나오지 않은 젖도 빨아 보고, 등에 올라가 말 타기도 하고….

 

엄마가 아무것도 모른 채 외할머니 옆에서 천진난만하게 노는 동안 외할머니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셨고, 결국 떨어지는 벚꽃과 함께 영면하시고 말았다. 걸음마를 겨우 뗀 엄마는 울음으로 가득 찬 장례식장에서 치맛자락 나풀거리며 떡을 주워 먹으셨다고 한다. 엄마는 한평생을 일만 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참 불쌍하다고 하시면서,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보니 어머니가 얼마나 살고 싶으셨을지 이해 간다고 중얼거리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친척들은 남은 살림과 과수원 일을 위해 서울에서 ‘중신'으로 새엄마를 모집했다. 새엄마들은 시골 부잣집에 시집온다는 부푼 마음으로 본가에 내려왔으나, 방대한 집안일과 끝도 없는 농사일에 대부분 얼마 못 버티고 집을 나갔다. 새엄마가 다 여섯 번 교체될 정도의 혼잡한 환경 속에서 엄마는 특유의 발랄함으로 주변 사람의 예쁨을 많이 받으셨다. 새엄마 중 한 명은 재봉틀로 원피스나 반소매 티셔츠 같은 것을 손수 만들어 엄마에게만 입혀주고, 엄마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갔다 내려오지 않아 증조할아버지가 엄마를 데리고 도망갔다고 노발대발하셨던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엄마는 학교 선생님들께도 예쁨을 많이 받았다. 일 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엄마를 굉장히 예뻐했는데, 언니를 기다리느라 교문 앞을 서성이면 엄마를 뒤에서 끌어안고 선생님께 고개를 숙이는 언니 오빠들의 인사를 같이 받게 하셨다고 한다. 또한 엄마를 ‘청소년 노래자랑’에 추천해 무대에 설 뻔했으나, 아쉽게도 목이 쉬어 나가지는 못하셨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엄마를 예뻐하셨던 건 외할아버지셨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카투사 출신이었던 외할아버지는 심성이 섬세하고 정직하셨다. 그렇기에 다른 군인들이 미제의 것, 예를 들어 비누라던가 초콜릿 같은 제품을 모조리 빼돌릴 때 하나도 건드리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런 성격을 가진 외할아버지는 농사일로 바쁜 와중에도 엄마의 줄넘기가 끊어지면 빨랫줄로 줄넘기를 새로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엄마가 학교에 늦은 날은 사 오십 분 정도 되는 거리를 직접 자전거로 데려다주시기도 하셨다. 또한 엄마가 냇가에 나가 놀다 귓병이 날 때마다 약을 꼼꼼히 발라주며 벽장 속에 숨겨 놓은 사탕과 껌을 꼭 하나씩 주시는 다정한 분이었다.

 

엄마는 다정하고 섬세한 외할아버지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예쁨을 받기 위해 땅바닥에 혹시 아버지가 필요로 하는 부품이 있을까 매일 고개를 숙이고 걸었고, 깜짝 놀라는 일이 있으면 ‘엄마!’ 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아버지!’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고 한다. 엄마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며 다시 생각해도 참 다정하고 좋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햇빛이 쨍쨍하던 어느 날의 오후였다. 엄마가 평소처럼 사랑방 나무 마루에 누워 해바라기 씨를 씹어 먹고 있는데, 담장 위까지 자란 해바라기 사이로 누군가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엄마의 마지막 새엄마였다. 새엄마는 누워있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가 상희니?”

 

엄마는 새엄마가 고사리 같은 엄마의 손에 ‘이브 껌’을 쥐어 주셨던 그때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말씀하셨다.


새로 들어온 엄마의 새엄마는 서울에 가끔 올라가 그 당시 귀했던 영양제도 사 오시고, 예쁜 원피스도 엄마에게 선물로 주시곤 했다. 엄마는 그런 새엄마가 굉장히 좋았다.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엄마의 부재를 새엄마가 채워줄 것만 같았다. 엄마는 그렇게 아버지와 새엄마와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신은 모두에게나 공평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이 오십 퍼센트 정도만 맞다고 생각한다. 신은 공평하게 행운과 불행을 함께 내려주시지만, 그 불행의 무게가 버티기 힘들 정도의 묵직함을 가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여름 지나 가을, 건강하시던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상에 쓰러지시게 된다. 병의 사인은 위암이었다. 매일 공기처럼 농약을 마신 외할아버지가 위암에 걸리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엄마는 안방 작은 문틈 사이로 가끔 아버지의 모습을 훔쳐봤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먹은 것을 전부 요강에 토하시곤 하셨는데, 그 모습을 본 새엄마가 엄마에게 ‘아버지가 무언가를 자꾸 드시고 싶어 하시니, 아버지가 안 보이는 곳에서 음식을 먹으라‘ 며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언질을 주었다.

 

엄마는 지금도 후회한다고 말했다. 새엄마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아픈 아버지에 대한 무서움 때문인지 입안과 식도가 다 헐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살고 싶어 매일 음식을 밀어 넣으시던 외할아버지의 방에 자주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한 말이다.


엄마가 삼 학년, 그러니까 열 살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수업을 듣고 있는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님이 엄마의 어깨를 흔들며 집에 어서 가 보라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의자를 빼고 자리에 일어 난 순간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엄마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언니 함께 학교 밖으로 나섰다. 생의 시작을 알리는 봄으로 가득 찬 거리는 오색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언니랑 울면서 꽃이 가득 심어진 다리를 건넜던 그때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고 엄마는 말했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자 음식이 가득 담긴 제사상과 함께 병풍이 쳐져 있는 안방에 아버지가 잠든 사람처럼 고요히 누워 계신 것이 보였다. 울고 있는 엄마와 언니를 발견한 새엄마는 용돈 하라고 주머니에 넣어 준 오십 원을 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오십 원을 노잣돈 하라며 상 위에 올려놓으셨다.

 

장례식을 진행하는 내내 엄마는 아버지와의 이별을 잘 체감하지 못했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잠깐 잠든 사람처럼 누워만 있으니, 어린 맘에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실 만도 했다. 다시는 아버지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장례식의 마지막 날이었다.


친척들은 방에 누워있던 외할아버지를 밧줄 같은 것으로 묶어놓은 뒤 할아버지의 입을 크게 벌렸다. 어른들이 보지 말라고 말하며 엄마를 방 밖으로 내쫓았지만, 엄마는 어른들의 다리 사이사이로 똑똑히 보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입에 쌀과 곡식 같은 것을 가득 붓는 모습을 말이다. 엄마는 그제야 자각했다. 그토록 섬세하고 다정하며,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해 주던 아버지의 품에 다시는 안길 수 없다는 사실을.

 

염을 끝낸 친척들은 울며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는 엄마를 붙잡은 뒤, 검정 고깔모자와 하얀 고깔모자를 외할아버지의 머리에 씌우셨다. 그리고 그를 관에 넣으신 후 열심히 키우시던 과수원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셨다. 슬픔으로 가득 찬 음울한 밤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후 엄마는 며칠을 끙끙 앓았다. 처음으로 체감하는 이별의 서러움 때문이었는지, 열이 펄펄 올랐다고 한다. 해가 저무는 오후쯤, 새엄마의 무릎에 누워있던 엄마가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났다. 그리고 계속 몸을 떨면서 마루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어른들은 그런 엄마를 보며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데려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은 놀란 마음에 한참을 훌쩍거리셨다고 한다.


엄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며칠 뒤인, 붓꽃의 보라색으로 세상이 가득 물든 오월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하게 준비를 한 새엄마는 잠든 엄마의 손을 붙잡고 대문 밖으로 나가셨다고 한다. 붓꽃이 흩날리는 거리로 나온 새엄마는 엄마의 손을 꽉 붙잡고 한참이나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셨다. 그리곤 엄마를 꼭 안아주며 돈 많이 벌어서 꼭 데리러 오겠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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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새엄마는 아무도 모르게 집 밖으로 도망가셨다. 붓꽃 냄새가 가득 찬 엄마의 방 책상 위에는 새엄마가 남겨준 ‘이브 껌’ 만이 남아있었다. 엄마는 그 이브 껌을 단 한 개도 씹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셨다고 한다.


그 뒤로 엄마는 시골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일여 년 정도 같이 살다 고모 할머니의 집으로 가게 되셨다. 엄마는 고모할머니의 집에서 썩 환대받지 못하셨다. 고모할머니는 걸레가 하얀 행주만큼 깨끗해야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셨다. 그렇기에 그동안 귀여움만 받았던 엄마는 백오십이 채 되지도 않는 키에 마른 몸을 가지고 집안의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또한 의심이 많으셨던 분이기에, 엄마는 아직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부르튼 손이 아직도 아파져 오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런 고모할머니네 집에서 독립한 것은 엄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고부터이다. 엄마의 껌 씹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즈음이다.


껌은 겉으론 단단해 보이지만 씹으면 굉장히 물렁물렁하고,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다는 특성이 있다. 항상 밝고 씩씩해 보이지만 수많은 이별의 아픔과 상처를 속 안에 품고 있는 엄마는 그런 껌을 단물 빠질 때까지 씹으며 지금까지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왔을지 모른다. 또한 씹을 때마다 치아 자국이 남은 껌처럼 엄마의 가슴속에 박힌 상처들은 지워지지도, 물러지지도 않고 계속해서 남아있을 것이다.


엄마는 이제 더 이상 껌을 씹지 않는다. 갱년기를 기점으로 잇몸이 많이 약해졌기에, 껌을 씹으면 치아에 통증이 느껴지시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이들과 이별만을 했던 우리 엄마 곁을 이젠 내가 껌 대신 채워드리고 싶다. 엄마의 이별은 대부분 봄에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엄마의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 내가 봄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는 영원한 엄마의 편이 되어드릴 것이다. 썩지 않는 껌처럼, 영원토록 변치 않게. 내가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라서 다행이다. 이런 내 다짐을 기록해 둘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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