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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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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전을 여성의 시점에서 다시 써왔던 극단 '적'이, 이번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를 재해석했다. 불륜을 의심받아 남편에게 목숨을 잃었던 데스데모나와 이를 사주한 악인 이아고, 그의 속을 모른 채 남편의 말을 따랐던 에밀리아와 부하의 말만 믿고 사랑하는 여인을 죽인 오셀로 등이, 1970년대 후반 급격한 산업화 속 가해자와 피해자로 등장한다.


욕망, 의심, 열등감, 질투, 불안, 간절함의 서사 속 이번 주인공은 데스데모나와 에밀리아다. 한때 희생되었던 여성들, 그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기승전결에 따른 유기적인 구성 대신 파편적으로 흩어진 이야기 방식을 선택했다. 여성적 글쓰기를 극적으로 재현하며 묻기 위해서다. 이 '집'은 누구의 '집'인지. 지금 알고 있는 '진실'은 누구의 '진실'인지. 그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감쪽같이 사라지고 어둠 속에 묻혀있던 목소리들. 존재조차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떠돌고 있었던 그 사람들의 기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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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차가 있는 두 개의 직사각형 무대가 양 갈래로 갈라지며 일부 포개어져 있다. 그 출발점에는 '문'의 형상이 서 있기에 쓰러진 대문 같기도, 펼쳐진 길 같기도 하다. 이 위에서 인물들이 움직인다. 마치 기억에 매여 떠도 듯이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무대의 위아래로 부지런히 자신들의 발자국을 남긴다.


그들은 가끔 무대의 모서리에 서서 관객을 향해 대사를 외치곤 한다. 그것이 주는 힘이 있다. 절박함이 되기도 하고 압박감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무대 위에서 거리를 조절하며 보여주는 장면들은 인물들 사이의 거리와 긴장감, 시시각각 변하는 분위기의 흐름을 오롯이 전달한다. 물론 극의 중간중간에 계속해서 해설이 등장하며 관찰자의 시점으로 관객을 이끌었지만, 관망 속에서도 빨려 들어가는 듯한 순간의 몰입을 부정할 순 없다.


무대 뒤쪽 벽은 반투명한 가림막이 한 겹 쳐져 있다. 앞서 말한 '문'이 여기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명이 켜져 있을 때, 인물들은 그곳으로 등장과 퇴장을 하곤 한다. 이는 산 자와 죽은 자, 화자와 대상, 회상과 또 다른 가능성을 구분 짓는다. '얼핏 보인다'라는 특징으로 이 극의 불확실한 배경을 상징하는 것이다.

 


내가 살던 그 집엔 - 컨셉2 제공 극단 적 ©sol__kim.jpg

 

 

극은 총 3부로 나뉜다. 1부는 딸인 '나'에게 '엄마'가 해준 '마마'와의 이야기, 2부는 '나'가 따라가는 '엄마'와 '마마'의 이야기, 3부는 그들이 살던 집을 찾아간 '나'가 그곳에 살고 있는 '꾸엔'을 만나 듣는 이야기. 각각의 시점은 '엄마', '마마', '나'로 이동한다.

 

1부는 신나는 '고고 리듬'에 맞춰 인물들이 시시때때로 춤을 추는 등 (그러지 않을 상황에도) 계속해서 '흥겨움'이 함께 하는데, 이는 아마 '엄마'의 환상과 입담이 섞여 그런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들었을 일종의 '영웅담'답게, 여기서 '나'는 '마마'의 역할을 수행한다.


2부부터는 '나'가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오며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는다. '마마'와 '엄마'의 첫 만남부터 예상치 못한 이별까지 그 뒷면의 이야기가 조명되며, 부분적인 사실들이 드러난다. 3부에서 현재의 '나'와 '꾸엔'의 대화는 앞선 사건들 이후의 이야기로 흘러가며, 남은 퍼즐 조각 몇 개를 더 맞춘다.

 

그러나 모든 사실은 중첩되기도 배반하기도 해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분명한 것은 결국 '마마'는 의처증에 시달리던 남편에게 죽임을 당했고, '엄마'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기억에 갇혀 있다가 죽었으며, '꾸엔'은 뒷마당에 매장된 '마마'의 시신을 제대로 장사해 주었다는 것, 그뿐이다.

 


내가 살던 그 집엔 - 컨셉3 제공 극단 적 ©sol__kim.jpg

 

 

'엄마'와 '마마'는 가정폭력과 비혼모라는 개인의 사정을 들여다볼 줄 아는, 서로를 참으로 위하고 걱정하던 사이였다. 그 시작이 우연이었건 돈을 노린 속임수였건 간에. 죽음으로 갈라지기 전까지 오가던 정만은 진실이다. '마마'의 고향으로 도망가려 했던 것도, 그렇게 함께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었던 마음도.


또한, '마마'가 떠난 그 자리에 들어오게 된 '꾸엔'이 남편의 비밀을 직감적으로 알아채며, 어쩌면 내가 됐을 수도 있는 망자의 마지막 길을 끝까지 신경 써 준 것도 진심이다. 가장 노릇에서 탈출을 꿈꾸던 여성,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어 하던 여성, 이주로부터 쉼을 찾으려 했던 여성.


이들의 바람 한편에는 나와 또 다른 여성에 대한 연민과 연대 의식이 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나'가 전해 받는다.

 

*


'엄마'가 아는 '오빠'이자 '남편'의 부하 직원은 박쥐 같은 인물이다. 그는 끊임없이 '남편'과 '엄마'의 귀에 속삭이며 의심을 일으킨다. 극 전반에서 과장된 제스처와 능구렁이 같은 모습으로 웃음을 유발했던 그는 '광대'이자 숨겨진 안타고니스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화교를 향한 혐오 감정과 편협한 태도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화교'. 오늘날 그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극을 통해 접하고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 살고 있는 화교들은 상대적으로 산둥반도 출신이 많다. 대부분 대만이나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


재한 화교의 시작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청국 조계지 설치로 인천에 유입된 상인과 노동자들로 볼 수 있는데, 극 중 명동성당을 짓기 위해 파견됐다던 '마마'의 할아버지도 그러한 '쿨리'의 일원이다. 이들은 만보산 오보 사건 때문에 1931년 평양에서 학살을 당하는 등, 악화한 국민 감정 때문에 피해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이 조금씩 언급되며 화교들에 대한 막연한 가정이나 편견을 지워나간다. 그리고 '방랑자'의 삶 그 자체로서 보게 한다. 더불어 당시 여성에 대해 공공연히 이뤄진 차별, '당연히 네가 참고 살아야지'와 같은 가부장제 하의 만행들을 함께 비추며, 어쩌면 아직 남아있을 피해자들의 흔적을 되새긴다.

 

 

내가 살던 그 집엔 - 컨셉1 제공 극단 적 ©sol__kim.jpg

 

 

이들에게 '집'은 무엇인가. 그것은 떠나고 싶은, 돌아가고 싶은, 머물고 싶은 추상적인 관념이자, 실질적인 안정성이다. 이동할 수밖에 없게 하는 원인이자, 정착하고 싶어 하는 이유이다. 그러니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 어떤 이들의 방황에, 끝까지 묵인하지 말아야 할 당위성 역시 쥐여준다.


그 필요에 있어선,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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