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잘 알려진 <햄릿>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받아왔으며, 그만큼 다양한 재해석이 존재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플레이위드 햄릿> 또한 <햄릿>을 새롭게 재해석한 연극이다.
앞서 말했듯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제목만 들어도 거의 모든 사람이 알 정도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유명한 작품임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이유는 작품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덴마크 왕자 햄릿의 고뇌는 25년을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나도 멀어 보인다. 그렇기에 햄릿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경우에는, 이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이 주가 된다.
<플레이위드 햄릿>에서는 원작의 내용을 크게 각색하기보다는, 연출과 설정의 면에서 그 거리를 좁히려 한다.
결정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는 ’햄릿 증후군‘과 같은 단어가 있을 정도로 생각이 많은 햄릿 왕자는 극에서 4명으로 분열된다. 그렇게 원작에서는 햄릿이 혼자만의 말, 독백으로 늘어놓았던 고뇌는 네 명의 대화로 무대에 올려진다.
아버지의 전화를 믿고 복수를 해야 할지, 주변 인물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초반부에 햄릿들은 대화를 통해 갈등을 보여준다.
점점 후반부, 햄릿이 정신적으로 몰리며 미쳐가는 후반부로 갈수록 이 대화는 독백의 형태로 변화한다. 결국 마지막 결투를 앞두고, 네 명의 햄릿들은 각자의 생각을 쏟아내며 최후를 맞는다.
특히 공연을 관람하며 햄릿에게 더더욱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바로 햄릿이 직접적으로 죽어야 할지, 살아야 할지 관객들의 투표를 통해 다수결로 정하는 장면이었다. 햄릿이 처해있는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에 고민하면서도, 대부분의 관객은 결국 삶을 택한다.
나중에 프로그램 북의 배우 인터뷰를 살펴보니, 아예 죽는다는 선택지를 골랐을 경우의 대본은 없는 것 같았다.
결국 햄릿은 치열하게 고뇌하면서도, 결국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음이 확실하게 와닿은 장면이었다.
이 연극에서 햄릿, 그리고 뒤에 언급할 호레이쇼를 제외한 인물들은 분열된 햄릿들이 각자 번갈아 가며 연기한다. 즉, 관객들은 보고 있는 햄릿 외의 인물을 햄릿에 의해 재현된 모습으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유일하게 햄릿이 외부의 존재에게 직접 말을 걸고, 대화를 주고받는 대상이 있다. 바로 호레이쇼다.
호레이쇼는 원작에서도 햄릿의 절친한 친구로, 햄릿의 모든 진실을 알고 이를 전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플레이위드 햄릿>에서는 그 역할이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난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인물이 관객이 되며, 그런 관객에게 햄릿은 죽어야 할지, 살아야 할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 모든 걸 쏟아내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노래하는 햄릿들을 보며, 무대 위 역할과 관객 사이의 관계는 연극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된다.
<플레이위드 햄릿>은 원작의 내용을 크게 각색하지 않으면서도, 4명의 햄릿이라는 설정을 통해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었다.
원작에서는 다소 추상적일 수도 있는 햄릿의 내적 갈등이 실체를 가진 네 명의 배우의 대화로 구성되며 더더욱 관객을 몰입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호레이쇼, 관객에게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