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문학’이란 어떤 의미일까?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문학 작품을 읽고 분석해왔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왔던 것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마치 나의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 한 친구를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다시 바라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문학에게 어떤 좋은 말을 붙여줄까 고민하고, 조금 더 근사한 말이 없지 않을까 하며 예쁜 단어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계속해서 고민은 늘어만 갔고 그럴수록 점점 말로 표현되지 않는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맴돌 뿐이었기에 오히려 생각을 멈추고 본질로 돌아오고자 하였다. 문학에 대한 나의 진심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라 내가 문학을 통해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다. 새파랗고 덜 익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게 문학은 따뜻하고 너그러운 빛을 비추어 주어 내가 더 여물고 단단한 초록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문학은 나에게 햇빛과도 같은 것이다. 즉, 어리고 좁은 마음에 이해의 폭을 비춰 너그러움의 미학을 알려준 문학은 나를 끊임없이 성장하게 하고, 그 속에서 다시 ‘나’를 발견하게 만들어주었다.
문학과의 밤 산책
햇빛과도 같은 문학과의 첫 만남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오래 전의 밤 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십 수 년 전 엄마는 두 살 터울의 동생과 나를 양 옆구리에 꼭 끼고 책을 읽어 주시며 우리를 재우셨다. 원하는 책 각각을 한 권 골라오라고 말씀하시면 동생과 나는 어떤 책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곤 했다. 매일 밤마다 거실 한 쪽에 있었던 우리만의 작은 서재 앞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발을 서성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 중 유달리 기억에 남았던 책은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다. 한 소년이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무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따라가는 이 그림책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을 주었다. 점점 자라면서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찾기 시작하는 소년에게 나무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 돈이 필요할 때는 자신의 사과를 팔라고 하고 집이 필요할 때는 자신의 가지를 주어 집을 지을 수 있게 하며 소년이 배를 원할 때에 나무는 자신의 줄기를 주어 배를 만들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마지막 부분이다. 시간이 흘러 소년이 노인이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나무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편안히 앉아서 쉬고 싶다고 말한다. 소년은 자신만큼이나 다 늙어버린 나무 밑동에 앉아 편안히 쉬었고, 그래서 나무는 무척 행복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나무의 모습이 어린 마음에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했다. 특히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지난 날에는 나무의 모습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나무의 모습은 이상스럽게도 나의 마음 속 깊이 뿌리내려 내가 성장하는 순간마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성장’은 나뿐이던 세상에서 타인을 만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타인을 사랑해보고 그에게서 상처도 받아보고 위로도 받아보았던 여러 경험을 지나보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모습은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사랑의 본질은 ‘주는 것’이며 진정한 사랑은 줌으로써 자신을 채우는 일임을 말이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주고 또 받는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그 때마다 나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떠올리며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랑을 만끽하고 싶다.
누군가 내게 문학의 힘을 믿게 된 계기가 있다고 묻는다면 아마 나는 이 시기를 꼽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몸과 마음이 자라면서 나는 더 많은 책을 읽게 되었고,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다양한 장르의 문학을 접하게 되었지만 언제나 ‘내’ 문학사의 시발점은 바로 그 어린 날 잊을 수 없었던 문학과의 밤 산책일 것이다.
새콤달콤했던 청포도 사탕을 통해 배운 문학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내 인생에서 문학작품을 가장 많이 접했던 때는 중 고등학생 시기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교과서, 자습서, 문제집 등에 있었던 수 많은 문학 작품들을 배우고 나면 고스란히 마음에 남기보다 시험이 끝난 후 그저 바쁘게 나를 지나쳐 버렸다. 아무리 내가 지독한 문과 성향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산더미처럼 쌓인 공부를 해야 했던 시기에 문학을 온전히 즐기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도 내가 문학의 즐거움을 잊지 않도록 도와준 분이 계셨다. 내 인생의 문학사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인 이 분은 나의 중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이다. 중학교 1학년부터 꼬박 2년을 함께한 나의 국어 선생님은 학생들이 진심으로 문학을 즐길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셨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기말고사가 끝난 어느 여름 날의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한 손에 사탕 꾸러미를 들고 교실로 오셨다. 청포도 사탕이 가득한 꾸러미는 연한 초록빛과 달큰한 내음으로 우리반 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청포도 사탕을 하나씩 나누어 주시며 오늘은 이육사의 ‘청포도’를 함께 배워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선생님의 미소는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신기한 듯 사탕을 받고 선생님이 낭독해주시는 시를 찬찬히 눈으로 따라 읽었다. 청포도 사탕을 입에 물고 시를 음미하니 시 속의 관념적인 청포도가 내 입 안으로 녹아 들어왔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중략)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 이육사 <청포도>
이육사 시에 담긴 푸른 희망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달콤한 사탕의 맛을 따라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고 첫 연에 언급된 청포도가 익어가는 칠월의 향이 시의 표현처럼 ‘알알이’ 들어와 박혀 나의 입안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내가 마치 마지막 연의 ‘아이’가 되어 하이얀 모시 수건을 곧 마련해 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청포도의 달콤함을 직접 느껴보니 이육사가 바랐던 넉넉하고 평화로운 삶의 모습의 아름다움을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조국 광복을 위해 열렬히 투쟁했던 과거 덕분에 수 십년이 지난 뒤 많은 학생들이 안전한 교실에서 우리의 말로 된 우리의 문학을 배울 수 있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신 작은 이벤트 덕분에 나는 문학을 단순히 텍스트를 넘어서 직접 느껴보는 경험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시’는 문학 중에서도 너무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부분이 있어 어렵다고 생각해왔는데 청포도 사탕을 통해 이육사의 ‘청포도’를 맛보니, 시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시는 더 이상 추상적이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친근한 문학이 되었다. 이 날 이후로 나는 시를 비롯한 어떤 문학을 읽을 때이던 최대한 감각을 사용하려고 한다. 문학 또한 엄연히 예술의 한 장르이기에 감정과 감각을 사용하여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그 본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고 믿게 되었다. 이처럼 문학을 통해 감각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면서 내 삶도 더욱 풍성하고 다채롭게 변하게 되었다.
가장 따뜻한 위로, 문학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있어서 문학에게서 가장 위로를 많이 받는 시기는 요즈음이라고 생각한다.
2022년 가을에 갑작스럽게 맞이한 아빠의 죽음은 이후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일상 생활 중 불쑥 찾아오는,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은 이십 대 초반의 나이의 내가 감당하기 에는 힘들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은 일상을 무너뜨렸고 계절의 흐름조차 밉게 만들었다. 약과 병원에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같은 아픔을 앓고 있는 가족들에게 의지하기란 더더욱 힘들었다. 특히나 요즘에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 속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힘에 부치는 시기였다.
그러던 중 지난 3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에게서 생일 선물로 책 한 권을 받게 되었다. 내가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말에 과연 어떤 내용을 담은 책일까 궁금증이 커졌다. 친구가 선물해준 책은 루리 작가의 ‘긴긴밤’이었다. 얼마 전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을 탄 책이라는 타이틀에 더욱 기대가 컸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이름 없는 ‘나’의 알쏭달쏭한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이름 없는 ‘나’와 노든의 로드무비이다. 세상의 무수한 시련이 그들 앞에 닥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긴긴밤을 버텨냈고, 노든은 치쿠와 윔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나’가 계속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나’가 에메랄드 빛 바다를 찾아 나서는 홀로 설 수 있는 펭귄이 되기까지 그의 아버지들이 되어줬던 노든 그리고 치쿠와 웜보의 이야기는 아빠의 죽음 이후 떠나는 것과 남겨지는 것에 무서움을 가지게 된 나를 천천히 다독여줬다.
세상에 남겨지는 일의 허무함을 알기에 가족과 친구를 잃은 노든이 세상의 마지막 흰 바위 코뿔소가 된 막막함에 더욱 공감을 하며 읽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잃은 노든이 ‘나’와 여정을 떠나 ‘나’를 돌보게 된 것이 오히려 노든에게 위안이 되었다고 느낀 부분이 특히나 좋았다. 타인을 돌보고 섬세한 사랑을 주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나를 채우는 일임을 노든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빠의 시간은 멈추었지만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든이 ‘나’에게 살아남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데도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가 치쿠와 윔보 때문이라고 말해준 대사를 보고 나서 깨달았다. 삶이라는 긴 여정의 돌봄의 연속이다. 노든은 어릴 적 할머니 코끼리에게 받은 사랑과 응원을 발판 삼아 용감하게 떠날 수 있었고, 아내를 만나 바깥세상에 적응할 수 있었다. 이십 년의 세월 동안 나는 짧지만 무엇보다 깊고 진득한 사랑을 받았기에 다시 사랑을 베풀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이름 없는 펭귄이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으로 바다에 닿을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끊임없이 삶의 이유에 대해 무감하게 만들었고 곧잘 무기력 해졌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버텼던 긴긴밤이 있었다는 사실, 함께 한 긴긴밤이 있었다는 기억만으로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어린 날의 밤 산책부터 시작해서 청포도 사탕의 달콤함을 맛보며, 마침내 아빠의 이별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나의 인생에 따뜻한 빛을 비추어 주었다. 문학이 보여준 따뜻한 빛 덕분에 나는 사랑의 힘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따뜻함은 추운 겨울의 시기 속에 있는 나임에도 단단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앞으로도 문학의 힘을 믿으며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