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퓰리처상 감이네’
이라는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본다. 우리는 보통 어느 순간에 거대한 의미를 담고 싶을 때, 아니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이 순간이 먼 훗날에도 큰 의미가 되어 회자될 것이라고 직감할 때, 아니면 그저 우리 눈앞의 상황을 무지막지하게 과장하고 싶을 때 ‘퓰리처상 감’이라는 말을 붙인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퓰리처상 감이라는 관용적 표현의 용례 자체가 사실상 퓰리처상의 실제 의미이기도 하다. 퓰리처상은 쉽게 말하면 그 해의 큰 사건을 사진으로 돌아보며 수여하는 상이다. 그리고 이 상은 강렬한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제법 대중성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Shooting the Pulitzer(퓰리처를 찍다)’라는 원제목이 한국 전시에서는 그저 ‘퓰리처상 사진전’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퓰리처상은 그 정도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진 분야에 주어지는 상이다. 놀랍게도 퓰리처상은 사실 음악, 소설 등 여러 분야가 있고, 사진은 퓰리처상의 하위 분야일 뿐이다.
우리는 왜 퓰리처상을 보고 싶어할까? 퓰리처상 사진전은 왜 2025년에 한국 관람객을 찾게 된 것일까? 사진전의 기획 의도를 유추해 전시를 보며 느낀 개인의 감상을 섞어 보았다.
사진: Alamy Stock Photo
사진의 의미, 의미 있는 사진
퓰리처상 사진전을 볼 때 우리는 상을 받은 ‘훌륭한 사진들’이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는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해서, 그 사진 자체를 감상하는 것 외에도 그 사진 이면에 있는 힘의 균형까지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그렇듯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한편 사진들 중에는 끔찍한 사건(주로 살인)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것들을 보며 퓰리처상 공모에 제출하기 위해 비극적인 사건을 연속적으로 담은 일련의 사진들 중에 ‘가장 탁월한 사진’을 선별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2003년 9월 11일, 불이 붙은 세계무역센터에서 구조를 기다리다 많은 사람들이 투신,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장면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사진이 AP통신의 사진가 리처드 드루의 ‘떨어지는 남자(Falling Man)’ 다. 마치 평온하게 날아가는 듯 추락하는 신원 미상인 남자의 몸이 거대한 고층 건물의 수직선과 일치하게 촬영된 이 사진은 공개와 동시에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 사진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이유는, 동일한 비극적 사건을 포착한 다른 사진이어도, 더 절묘하게 촬영된 이미지가 대중의 뇌리에 더 깊이 각인됨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렇듯 의도와 다르게 이미지가 주는 강렬함으로 인해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이 왜곡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은 퓰리처상 수상작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사진을 촬영한 기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찍었다’는 말이 많다. 그러니까 현장에서, 모든 상황을 기록하며, 직접 뷰파인더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사건의 본질은 먼 훗날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이 일어날 것을 직감하며 기계적으로 포착한 순간들. 포착되지 못하는 순간들에 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사진: Alamy Stock Photo
사진가의 의미
이번 퓰리처상 사진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전시 벽에 이따금 적혀 있는 퓰리처상 수상자들의 인터뷰를 인용한 문구였다. 그 사진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전하는 기자들의 말, 또는 전쟁 취재 중 사망하고 말았다는 기자의 근황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편안히 보는 사진 한 장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현장에 존재하는 기자들의 윤리적 갈등과 트라우마를 특히 강조한 전시로 생각된다. 특히 ‘뱅뱅 클럽’이라는 모임의 이야기에 특별히 전시 공간을 일부 나누어 준 부분이 가장 인상 깊다. ‘뱅뱅 클럽’은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취재한 네 명의 기자들이 결성한 그룹이다. 그룹의 이름은 낯설겠지만 굶주린 소녀를 노리는 독수리를 포착한 작품인 ‘수단의 굶주린 소녀’는 익숙할 것이다.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1993년 이 작품을 촬영했고, 퓰리처상을 수상했으나 심각한 비판 여론에 시달렸다. 눈앞의 소녀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먼저 촬영했다는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진기자가 현장에서 당장의 생사를 오고 가는 상황에 직접 개입하지 못하는 것에 관한 비판, 그리고 자책은 사진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에서 오는 정말 특수한 논쟁거리이다.
사진: Alamy Stock Photo
퓰리처상 사진전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와 문제에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상황을 촬영했다는 현장감과 전문가의 손에서 탄생한 완벽한 구도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작품성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강렬한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누군가는 탈력감을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활동과 사명감을 가지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강렬한 이미지가 대중에 주는 힘이자 한계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될 지는 사진이 정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부끄럽지 않게 기록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