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국
비행시간은 열 시간. 나는 생각한다. 이 열 시간은 정말로 ‘열 시간’일까? 정방향적인 열 시간이 맞을까? 호주와 한국의 시차는 한 시간. 호주가 한 시간 빠르다. 그렇다면 시간을 조금은 거슬러 가는 거지 않을까? 자연의 물리법칙에 대담하게 맞서는 인간의 기술력(감히?).
그래서 비행기는 마치 시간 여행 장치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 ‘시간 여행’은 비행기에서만 이뤄지는 걸까, 아니면 도착지에서까지 이어지는 걸까? 도착지에서 발생하는 시차 문제는 여행 후유증, 여독과 다르지 않다. 눈이 무겁고 머리가 빙빙 도는 여행이 어디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창밖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 틀어박혀 시간을 축이는 건-물론 그 안에서 화장실도 갈 수 있고 핸드폰으로 영화도 볼 수 있고 밥을 주기도 하지만-여행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비행기는 시간 여행 장치가 아니라 그냥 비행기일 뿐이며, 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결국 좀 많이 긴 카운트다운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책에서 읽은 것 같아 잠시 글을 멈춘다. 책장을 바라보다가 한 책을 꺼낸다. 이장욱의 단편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 그 중 첫 번째 실린 소설 <절반 이상의 하루오>를 펼친다. 세계를 여행하는 ‘하루오’라는 이상한 작자가 나오는 소설이다. 밑줄 친 문장들을 훑는다. ‘시간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는 꼴이랄까(14)’, ‘세상의 모든 목적지들이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사람에게 목적지가 필요한 게 아니라 목적지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인간이 떠나고 돌아오는 게 아니라 떠날 곳과 돌아올 곳이 인간들을 주고받는 게 아닐까(15)’ 내가 찾던 문장은 발견되지 않는다. 길 잃은 나는 다시 이 글로 돌아온다.)
기내에서 이것저것 해야지 생각하고 영화를 다운 받고, 책을 챙겨두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명을 모두 껐다(독서등은 키는 순간 내 자리를 단독 콘서트 무대로 만들어버릴 것처럼 높다란 천장에 위엄 있게 붙어 있었다). 핸드폰으로 영화를 틀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쿠팡에서 산, 만 얼마 하는 목베개는 비행기 좌석의 머리 부분에 고정된 쿠션과 기막힌 부조화를 보여주었다(그 쿠션 또한 목이 안정을 취하기엔 30퍼센트 정도 부족한 각도였다. 쿠션을 조작할 수 있다는 건 귀국행 비행기에서 알게 된다).
그렇게 깬 건지 잠든 건지 모를 상태로 있었다. 있었다. 그저 있었다. 존재했다. 존재가 이렇게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다행히 시간은 흘러갔고, 창가에 앉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창문을 열자 환한 아침의 빛이 침투했다. 얼마 후 비행기는 도착지, 시드니 공항에 발을 붙였다.
이제부터 긴장해야 한다. 포켓 와이파이를 키고, 수하물을 찾고 조심히 입국심사장으로 들어선다. 이렇게 긴장하는 건 호주의 까다로운 입국신고서 때문이다. 호주는 음식이든, 상비약이든 뭐든 있으면 있는대로 세관 신고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간 적지 않은 벌금이 먹여진다(는 얘기를 출국 전에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미리 입국신고서 양식을 찾아 모범 답안까지 작성해 갔지만, 기내에서 실제 입국신고서를 받고서도 몇 번이나 진땀을 빼며 수정을 거쳤다 보니, 입국심사장에서 우리가 작성한 신고서를 이상하게 보면 어쩌지? 할 정도로 이미 기가 눌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맥이 빠질 정도로 통과가 쉽다. 우리 가족이 만반의 준비를 해온 걸 느낀 건지 직원들이 허물없이 보내준다. 그렇게 시드니에 입성한다.
호주의 독특한 규칙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가 환히 반긴다. 그는 우리를 비롯한 관광객을 인솔해 공항 주차장에 서 있는 미니버스에 태운다. 운전석은 오른쪽에 있고, 버스 문은 왼쪽에 있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다. 그제서야 안다. 여기는 좌측통행이고 여름이구나. 아, 내가 이국(異國)에 왔구나.
실감과 함께 버스는 출발한다.
당장 호텔로 가서 깨끗하고 구김살 없는 침대에 몸을 내던져야 할 것 같지만, 버스는 시드니 시내를 가로지른다. 창밖으로 높다란 구름, 초록의 나무, 얇은 옷차림의 사람들, 서양식 건물들이 스쳐 간다.
가이드가 호주에 관한 이런저런 사실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나는 비몽사몽하면서도 메모장을 켜서 받아적기 시작한다(패키지 여행마다 내 습관이고, 내가 이 글에 적을 대부분의 호주 이야기는 이 메모를 바탕으로 한다).
호주에선 담배가 오만 원이고(그 대신 의료비가 거의 공짜라고 한다), 건물 비상계단은 절대 열면 안 되며, 만약 열 경우 즉시 그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말한다(정말로 비상시에만 열게 되어 있는 문으로, 열게 되면 벨이 울리고 소방차가 출동한다고 한다. 허위신고로 밝혀지면 1500달러의 출동비가 청구된다고). 무단횡단이 합법(?)이며, 모든 횡단보도는 그 앞 전봇대에 붙은 버튼을 눌러야만 신호가 바뀌어 건널 수 있다고 한다. 안전벨트가 모든 좌석 의무이고, 달리는 차 안에서는 물을 제외한 모든 음식 섭취가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건 경찰 단속 대상이라고 한다. 음식 때문에 벌레가 꼬이는 걸 싫어해서 그렇다며, 그래서 호주가 이것저것 음식 수출은 많이 해도 들여오는 것에는 까다롭다고 한다. 나는 입국신고서가 은근 까다로운 이유를 이해할 것 같다.
더 록스
이런 얘기도 한다. 시드니는 대부분 사암 지형인데, 1788년 영국에서 온 첫 이주민들이 이곳 더 록스(Rocks)에 정착했을 당시부터 그것들을 깎아내기 시작했다고. 가이드가 가리키는 창밖엔 정말로 바위를 절단한 듯한 벽들이 보인다. 나는 그제서야 호주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그때 차가 멈춰 선다. 이제 내리면 진짜 시드니 도심이다. 그런데... 내리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터무니없다.
하버브릿지 밑으로 저 멀리 오페라하우스가 보인다(그때까지 나는 하버브릿지가 뭔지도 모르고 있다. 그만큼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꿈 아닌가 싶은 풍경에 정신이 멍해진다.
점심은 바로 그 옆의 하버뷰 호텔(호주의 호텔은 우리가 아는 호텔이 아니라 술집, 식당이라고 한다).100년 이상 된 식당으로, 하버브릿지 건설로 인해 없어질 뻔했으나 그 옆 건물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관광객인 우리는 현지인들이 있는 1층이 아닌 2층으로 올라간다. 2층도 인테리어가 고풍스럽다.
메뉴는 스테이크. 호주에서의 첫 식사다. 호주 청정우들은 신선하기로 유명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런 마블링은 없다는데, 정말로 없다. 미리 준비한 듯 약간 식어 있었지만, 스테이크 소스가 맛있고 감자샐러드가 크림처럼 부드러웠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이번엔 하버브릿지 밑으로 조금 더 걸어간다. 오페라하우스가 제대로 보인다. 볼수록 아름답다. 그때 풀밭에 돌연 나타난 새 한 마리. 아이비스.
돗자릴 깔고 누워있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간다. 그러나 우리가 다가가자 도망간다.
그때 가이드가 우릴 불러세운다.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라 요 옆이라고. 하버브릿지 밑과 하버뷰 레스토랑 사이를 보니 마켓이 서 있다. 여기가 더 록스예요. 주말마다 이렇게 록스 마켓이 열린다고 한다.
자유시간이 주어지고, 우리는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향신료, 장신구, 그림, 먹을 게 즐비하다(하지만 사진 않는다). 우리는 마켓을 가로질러 현대 미술관을 가로지르고 항구변으로 나가 정박해 있는 크루즈와 건너편의 오페라하우스, 항구를 구경한다.
어느새 자유시간은 끝나고 가이드가 우릴 부른다. 가이드는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록스 군데군데 있는 역사의 흔적을 알려준다.
록스 입성 당시 군인, 관료, 죄수 세 부류가 들어와서 개척했다고 한다. 그래서 삼면에 각 직업군을 상징하는 조각이 파여져 있다.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벽화. 호주의 개척 역사가 한눈에 볼 수 있게 그려져 있다. 이곳을 갈아엎고 고층 건물을 개발하자는 붐이 일었을 때 잭 문디라는 사람이 보존해야 한다고 막아서 지금처럼 남아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한적한 건물 뒤편에 들어서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지하는 뭔가 으스스하면서도 왠지 술집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가이드가 역사 이야기를 꺼냈다. 정착 초기에 호주 사람들은 지하에 노예들을 두었고 1층엔 상가, 2층엔 사무실, 3층엔 건물주의 집을 배치했다. 그러나 1910년 무렵 전염병이 돌았다. 당연히 지하에 사는 노예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전염병이 위층으로 퍼지면서 위층에 사는 사람들이 죽어갔고, 결국 개혁이 일어났다고 한다(?). 지하에 사는 사람들을 땅 위로 끌여 들여서 집도 지어주고 하면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고. 아리송한 해명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호주의 역사는 침입과 개척의 역사로 자리잡았다. 원주민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어서 마치 공기에 물이 차듯 그 비어있는 부분에 상상력이 들어찼다.
가이드가 <포춘 오브 워>라는 술집을 가리키면서, 개척 당시 영국에서 호주까지 배로 8개월이 걸렸고, 그래서 도착하면 축하의 의미로 저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는 얘기(영국으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를 할 때도 나한텐 그리움의 정서랄까, 모험에 도사리는 위험이랄까 그런 게 상상되지는 않았다. 한 영토에 어떤 식으로 지배의 그림자가 들어서기 시작했는지, 그런 것만 보였다.
이제는 페리를 타러 갈 거라고 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항구로 나왔다. 티켓을 받아들면서도 나는 그 배가 어디로 갈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