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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이 글은 혐오가 깊어지는 사회에 던지는 짧은 제안서이다.

 

사회는 무엇일까. 사회는 개개인이 모여서 만드는 하나의 글이다. 아름다운 글은 마음을 사로잡는 단 하나의 문구로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대개 문장 간의 어울림과 부드러운 흐름으로 완성된다.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특출한 개인이 사회를 끌어나가는 예도 있지만 결국 개인들 간의 조화가 그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글자와 글자가 서로를 미워하게 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마도 사회가 태동했을 때부터 진보와 보수가 있었고 호남과 영남이 있었으며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그 증오는 더욱 구체화되어 성별, 정체성, 직업, 계층 등을 가리지 않고 확산되고 있다. 양쪽으로 힘을 주어 찢어지는 종이처럼 극단으로 달려가는 사회의 갈등은 그 골을 더 깊게만 만든다. 혐오는 이제 단순한 비판을 넘어선 지 오래다.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단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그 속에서 증오는 정당화된다. 증오를 넘어 혐오가 팽배하는 이 사회를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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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라는 텍스트


 

문제는 혐오와 증오가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회 현상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맘충’, '퐁퐁남', '한남' 등의 단어가 생겨나고 정착되는 과정을 목격했고 남성 혐오와 여성 혐오가 반복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의 사회에 만연한 혐오들은 처음에는 나름의 논리를 갖춘 크고 작은 비판에서 출발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비판을 공유하고 확산하며 유희의 일종이 되었고 이윽고 조금씩 변질되었다. 비판의 대상은 처음의 논점과 무관하게 유행처럼 혐오의 대상으로 번진다. 그렇게 또 하나의 혐오가 태어난다.


 

(4) 혐오 표현을 보거나 들었을 때 어떻게 대응하였습니까?

 

2023년도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에 응답한 응답자가 가장 많았다(71.9%). 그러나 과거 년도와 비교해보았을 때 혐오표현에 동조하는 의견이나 행동을 취했다의 방향으로 사람들이 더 기울어지고 있으며 적극적인 반대의견 표명행위나 조치를 취하는 비율은 낮아진 것으로 나타난다.

 

- 국가인권위원회, 2023 인권 의식 실태조사 심층분석 보고서

 

 

혐오의 발생과정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진행 중이다. 그 과정의 끝에 이르게 되면 사실 무엇을 미워하는 지도 분명치 않아진다. 모름에도, 그 흐름에 동조하게 된다. 사회라는 글 속의 글자인 우리는 글자 너머의 어떤 허상을 증오하게 되어버렸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기에 이제는 사회라는 텍스트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 ‘너’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평화’는 어떤 글자가 모여야 만들어지며 ‘여자’와 ‘남자’는 어떤 단락을 이루고 있는지 말이다.

 

해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문장이나 사물 따위로 표현된 내용을 이해하고 설명함. 또는 그 내용’, 혹은 ‘사물이나 행위 따위의 내용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일. 또는 그 내용.’ 차이가 있다면 글에 대한 해석이 전자에 가깝다면 여기에서 해석은 후자에 가깝다는 것이다. 사회라는 조금 특수한 텍스트의 해석 방식은 두 가지 방식을 조합하여 만들어진다. 텍스트의 단어, 문장, 혹은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완전하게 읽어본다. 그리고 그 대상을 판단하고 이해한다.

 

 

 

해석의 세 가지 차원


 

사회라는 글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차원의 해석이 필요하다. 개인, 집단, 그리고 사회 전체에 대한 해석이다. 이 세 가지 해석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혐오가 아닌 공존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개인 차원의 해석은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 실현될 수 있다. 사람 간의 갈등은 대개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대개는 상대방을 해석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단지 게으른 독자가 그러하듯 보고 들을 뿐이다. 우리는 조금 더 성실하고 적극적인 독서가가 되어야 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이를 비상식적인 일이라고 비난부터 하기 전에 상대를 온전히 수용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약속을 어겼을 때 그 사실을 그저 '읽기만' 한다면 우리는 쉽게 그를 무례한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하지만 단어 주위에 존재하는 맥락을 파악하여 상대를 해석한다면 어떨까. 전체적인 관점에서 그를 수용한다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 그 이면을 해석하지 않고 단순 감각적인 수용만 한다면, 오해와 불필요한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개인 차원에서의 해석은 공인이나 연예인이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는 사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대중에게 친밀감과 거리감을 동시에 선사하는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쉽지만 그만큼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쉽다. 따라서 그 대상이 누구이든 판단 이전에는 제대로 된 해석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통한 단어와 단어 간의 화해는 결합력 있는 문장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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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대한 해석은 조금 더 복잡하다. 개인에 대응하는 단어의 해석은 단어 하나만을 고려하면 되지만,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단어와 문장 모두를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단적 차원의 해석이 간과되었을 때 발생하는 문제가 바로 일반화를 통한 집단 혐오이다. 예를 들어, ‘맘충’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단어는 특정 행동을 하는 일부 어머니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했다. 하지만 점차 그 대상이 확장되며 어머니라는 집단 자체가 비하의 대상이 되었다. 특정 직업군, 세대, 성별에 대한 무분별한 혐오는 결국 잘못된 해석의 결과에서 비롯된다.

 

잘못된 번역은 그 문장 하나가 아닌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을 방해한다. 사회라는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글 속에 배치된 하나의 문장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전체 사회에 균열을 가져온다. 따라서 집단에 대한 해석은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특정한 행동이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또는 집단 전체가 아닌 일부의 문제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개인에 대한 해석을 확대하여 집단에 대한 해석에 적용하는 것은 집단을 해석할 때 가장 지양해야 하는 행위이다. 문장은 단어 하나로 요약될 수 있지만, 단어 하나를 가지고 전체 문장을 해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장과 단어를 구분하고, 그 문장이 사회의 어떤 구성원들로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때 우리의 사회는 비로소 명료한 단락을 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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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차원의 해석은 개별적인 사례를 넘어, 사회적 흐름을 읽는 것이다. 위의 두 차원에 대한 해석이 글의 균열을 막는 방법이었다면 사회적 차원의 해석은 균열을 감지하는 방법이다. 모든 글이 그렇듯 사회에도 흐름이 존재한다. 그 흐름이 어떤 집단이나 사건을 향할 때 현명한 독자는 그곳에 주목한다. 따라서 사회가 특정한 집단이나 현상을 향해 증오의 방향을 정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이슈가 발생했을 때 언론과 대중의 반응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흐름이 누구에 의해 형성되는지,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분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흐름에 휩쓸려 또 하나의 혐오를 양산할 뿐이다. 그렇게 꾸준히 이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글이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한 독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해석이 필요한 사회


 

세 가지 차원의 해석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개 복잡한 글을 잘만 해석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해석하지 못한다. 이는 연습의 문제이며 인식의 문제이다. 현재 대화의 화두로 올리고 있는 사람이, 혹은 사회가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이 필요하다는 인식. 인식 이외에 해석에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느림이다. 사회는 자전 속도가 빨라지는 것 마냥 빨라지고 있다. 바쁜 일상 속 빠른 판단을 요구받기에 우리는 쉽게 외부 의견에 휩쓸린다. 그런 상황에서 느린 해석적 접근법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빠른 판단은 종종 잘못된 해석으로 이어지고, 혐오는 그 틈을 파고든다. 조금의 느림을 가지고 사회를 해석한다면 사회가 조금이나마 더 유려하고 부드러운 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아직 미숙한 독자인 내가 읽었던 책 중 시간이 걸릴지언정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없었고 그것은 사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글이든 훌륭한 독자를 만나면 그 빛나는 의미를 찾듯 훌륭한 해석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해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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