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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사진은 예술이다. 빛을 포착해서 재현하는 기계 장치는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영역에서 회화의 자리를 한동안 밀어내면서 사실의 예술로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예술이 창작자의 내면, 심리, 의도의 표현 따위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도 ‘무엇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사진은 예술의 영역에서 여전히 사랑받았다. 말하자면 사진은 사실성과 내면성을 모두 포착하는 예술 매체로 발전해 왔던 것.


다만 ‘퓰리처’는 우선 사실성에 집중하여 현실과 세계를 긴밀히 포착한 작품에게 주어지는 영예다. 사실과 현실의 영역에 초점을 맞추므로 순수 예술보다는 주로 언론의 테두리 안에서 다뤄진다. 그러나 그러한 사진들조차 여느 예술과 마찬가지로 관람자의 내면을 일렁이게 하는 거대한 충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매순간 생동하는 사실의 세계를 가장 밀접하게 포착했을 때, 그 현장을 목격한 내면의 어떤 것이 바뀐다. 그 내면의 변화가 다시 세계를 진동하고, 혁신하며, 때론 창조한다.


퓰리처상 사진전 SHOOTING THE PULITZER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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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로 정렬된 순서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본다. 그 옆에 쓰여 있는 코멘트를 읽는다. 다시 사진을 본다. 이 순서로 감상을 시작하면 전시장의 모든 사진을 적어도 두 번씩은 보게 되는 것인데, 첫 번째 바라봄이 사진 이미지가 발산하는 강렬한 감정이 다가오는 ‘응시’의 과정이라면, 두 번째 바라봄은 이미지가 담고 있는 맥락이 차갑게 파고드는 ‘인식’의 과정이 된다. 감정을 일으켜서 어떠한 인식을 전달하는 것. 어떠한 예술은 이러한 방식으로 감상하는 것이 마땅하다. 퓰리처상 사진전의 거의 모든 사진이 그렇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퓰리처상 수상작 중 하나일 조 로젠탈의 <성조기, 수리바치산에 게양되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일본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오지마에서 포착한 사진이다. 미국의 해병들이 거대한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애국, 충성, 희생 등의 단어가 먼저 떠오르고, 그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일부러 연출한 것만 같은 완벽한 구도의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본 뒤 읽어간 설명문에는 이러한 문구가 스치듯 쓰여 있다. “사진 속의 해병대원 3명을 포함한 6,821명의 미군이 사망했다.” 그 어떤 위대한 대의를 품고, 수많은 숭고한 장면을 만들더라도, 전쟁은 전쟁이라는 것. 전쟁은 사람이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라는 것. 전시장 내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너무도 많은 ‘전쟁’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나는 그 사진들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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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로렌탈, <성조기, 수리바치산에 게양되다>

 

 

스탠 그로스펠드는 아마도 소리를 찍었을 테다. “굶주린 아이들이 죽어가며 내는 신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고양이 울음소리 같았어요.” 그의 사진 <에티오피아의 기근>은 빛을 통해 생생했던 그 ‘울음소리’를 포착한 작업이었을 것. 굶주린 아이가 내는 소리는 짐승과 같다. 이것은 하나의 생물로서 자연스레 드러난 인간의 야생성이 아니라, 인간을 굶겨 짐승처럼 울게 한 사회적 야만성의 산물이다. 야만에 할퀴어진 아이는 사진에 담기고 몇 시간 후에 죽었다고 했다. 퓰리처상의 많은 사진들은 말한다. 이 땅의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가난은 존재한다고. 가난의 이미지는 누군가의 렌즈가 빛으로 포착한 소리다. 살려달라고,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외치는 소리.

 

누군가는 고통을 직시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다면, 누군가는 마땅히 칭송받아야 할 일들을 존경하며 사진을 든다. 전신주에서 감전된 동료에게 세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로 생명을 불어넣는 전기기사를 포착한 로코 모라비토의 <생명의 키스>, 인종 차별 항의 집회를 탄압하는 경찰을 향해 그들이 쏜 최루탄을 되돌려주는 남자의 사진 <퍼거슨의 시위>(로버트 코헨, 2015) 같은 사진들. 전쟁과 가난과 죽음. 인간이 만든 세계에 만연한 것들 앞에서 결코 굴복하지 않는 사람의 일들. 어쩌면 기적과 같은 용감하고 놀라운 일들 또한 우리가 머물고 있는 현실에 분명 존재한다. 그런 현장을 찍은 사진들은 다시 세상을 울린다.

 

누군가, 살았다, 혹은 몇 명이, 죽었다. 상황을 단출하게 묘사하고 설명하는 냉정한 육하원칙의 문장과 한 장 사진에 인간의 슬픔이 스며들어 있다. 퓰리처상이 당대의 현실을 가장 첨예하게 포착했다면, 그 사진들 속 우리의 현실은 사람과 사람이 벌이는 전쟁이고, 사람과 사회가 싸우는 기근이다. 그러나 현재를 포착하고 과거를 기록한 어떤 사진들은 이미지로 말을 건넨다.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이 손을 맞잡는 저항과 연대도 존재한다고. “만일 우리에게 이를 이해할 지혜가 있다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엿볼 수 있다”고.


세상이 바뀌면 생각이 변하지만, 생각이 변하면 세상도 바뀐다. 세계가 내 마음을 만들고, 내 마음이 곧 세계를 다시 만들어낸다. 구조주의와 실존주의를 부드럽게 순환하며 ‘범아일여’를 가장 가깝게 구현하는 예술 방식으로서의 사진. 인식 변화의 계기가 되는 바로 그 한 장, 그것을 위해 오늘도 사진은 쏘아진다. 세상을 향해서, 세상을 위해서.

 

 

당신을 웃거나, 울거나, 가슴 아프게 한다면 제대로 된 사진입니다.

 

- 에디 애덤스 (1969년 퓰리처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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