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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2025년 올 설 연휴에 비극적인 뉴스가 들려왔다. 아내를 살해한 60대, 그리고 동거녀를 살해 후 자살한 남성. 사랑이 집착과 광기로 변한 사례다. 반면 2000년에 발매된 김광진의 <편지>에서는 건강한 이별을 보여준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면서도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성숙한 사랑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각종 미디어 콘텐츠에서, SNS에서까지도 사랑은 넘쳐흐른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며 현대 사회엔 순수한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최근 관람한 뮤지컬 <베르테르>에서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순수한 사랑'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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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베르테르>는 올해 25주년으로 3월 16일까지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베르테르는 롯데를 만나 약혼자가 있는 줄 모른 채 사랑에 빠진다. 정인이 있음을 알고 나서도 그녀의 곁을 맴돌며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이를 두고 집착적인 사랑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결코 롯데를 해치지 않는다. 스스로의 비극적 결말을 맞았지만 사랑이 증오와 폭력으로 변질되지는 않았다.


베르테르는 롯데를 사랑하면서도 그녀를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롯데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며, 그녀가 자신을 위해 희생을 하거나 본인을 사랑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물론 베르테르의 사랑이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는 아닐 수 있다. 그의 감정은 너무 강렬했고, 결국 파멸로 이어졌다.


현대사회에서 사랑이 집착과 폭력으로 변질되어 상처를 주고 상대를 파괴하는 모습을 볼 때, 베르테르의 순수한 사랑이 떠올랐다. 사랑이 만연해진 현대에는 베르테르의 순수한 감정, 강요하지 않는 태도, 폭력 없는 사랑이 필요하다.


완벽하지 않은 베르테르의 사랑이 관객에게 닿아 설득될 수 있던 것은 뮤지컬의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깊이 있는 연기력 덕분이다.

 

 

 

베테랑 배우들의 깊이 있는 연기력


 

뮤지컬 베르테르 25주년 기념공연 캐릭터 포스터 베르테르 역 엄기준_제공 CJ ENM.jpg

 

 

베르테르 역의 엄기준은 2002년부터 무려 7번째 베르테르를 맡아온, 그야말로 '역사' 그 자체인 배우다. 그래서인지 그는 베르테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완벽히 몰입해 연기했다.


뮤지컬 속에서 엄기준 베르테르는 사람이 사랑을 하며 느낄 수 있는 모든 찌질함과 못난 모습들을 그대로 다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누구보다 솔직했고, 그 감정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소중히 품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순수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짝사랑의 민낯까지 여실히 보여주었기에 더욱 동정심이 생기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뮤지컬 베르테르 25주년 기념공연 캐릭터 포스터 롯데 역 이지혜_제공 CJ ENM.jpg

 

 

뮤지컬 '베르테르'의 사랑스러운 주인공 롯데 역에 배우 이지혜가 캐스팅되었다. 인형극을 하며 신비한 모험에 들뜬 이지혜 롯데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싱그러움이 있었다. 또한 성악을 전공으로 하셔서 그런지 음색과 노래도 아름다웠고, 롯데 특유의 에너지 넘치고 맑은 연기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특히 베르테르는 앙상블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다양한 역할을 맡아 작품의 분위기와 스토리 전개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꽃을 사세요'라는 곡에서 앙상블은 꽃을 파는 사람들로 등장하여 무대의 생동감을 더했다. '오, 카인즈'에서는 안타까운 선택을 한 카인즈의 상황을 전달하고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앙상블 배우들은 마을 주민, 파티 참석자 등 여러 배역을 소화하며 주인공들의 감정과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전달한다. 자연스럽고 유머러스한 캐릭터들 덕에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환기시키기도 하고 주인공의 감정선을 강조시켜서 효과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역할을 통해 작품의 몰입도를 높이고, 무대의 분위기를 다채롭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름답고도 충격적이었던 해바라기 무대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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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베르테르'에서는 해바라기 연출이 가장 압권이었다. 롯데가 소중히 키우는 싱그러운 꽃이 가득한 화실, 배우들의 다양한 의상도 아름다웠지만, '해바라기'가 베르테르 그 자체이자 뮤지컬의 전반적인 키워드였다.


해바라기의 꽃말은 '일방적인 사랑'이라 한다. 해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당신만 바라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베르테르는 롯데에게 거절당한 후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눈다. 무대 위 해바라기들이 무성하게 꽂혀있다. 마치 아름다운 해바라기 밭에 와있는 듯 무대는 아이러니하게 풍성하고 아름답다.


뮤지컬 '베르베르'에서는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암시한다. 마지막까지 예쁘게 만든 작품이었다. 주인공이 무대 시야에서 사라지고 이윽고 하나만 남고 모든 해바라기들이 쓰러진다. 총성과 함께 마지막 하나의 해바라기가 힘없이 풀썩 쓰러진다. 마지막 해바라기가 툭 쓰러질 땐 마음이 같이 툭 떨어지는 듯 했다. 은유는 실제를 낭만적으로 만들기도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아름다운 충격에 커튼콜이 오를 때까지 감정이 벅차올라 눈물이 계속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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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는 정승호 무대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였다. 원작에서는 해바라기가 쓰이지 않는다. 노란 해바라기는 베르테르의 감정을 더 풍부하게 전달하고, 서정성을 강조한다. 객석에 들어올 때부터 무대 위 한편에, 그리고 오케스트라 주변에 해바라기가 펴있다. 그때부터 극은 시작되고 있었다. 해바라기의 슬픈 아름다움의 의미를 완벽하게 연출한 것이다.

 

커튼콜까지 베르테르는 캐릭터의 몰입을 유지했다. 롯데와 알베르트가 객석에 인사를 한 뒤 손을 잡고 일어나는 와중에 엄기준 베르테르는 애써 그 위에 손을 얹어보지만 둘은 먼저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베르테르는 무대장치에 앉아 공중으로 올라가는데, 그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의 해바라기는 쓰러졌지만 그의 사랑은 사람들에게 남아 여운이 되었다.


문득 살면서 목숨을 바쳐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었나, 목숨을 바칠 정도로 무언가에 열정을 가득 담은 적이 있던가 생각이 들었다. 베르테르는 사랑의 열정 그 자체였다.

 

뮤지컬 <베르테르>가 25년 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탄탄한 각본은 물론, 연기, 음악, 노래, 무대 연출까지 완벽했다. 감정을 깊이 울리고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순수한 사랑이 점점 희미해지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작품. ‘베르테르’를 통해 가슴 저미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느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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