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랑 이야기를 일종의 성장담으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청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뮤지컬 <베르테르>도 그렇지 않을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베르테르가 아니라 베르테르라는 폭풍을 겪고 남겨진 롯데나 알베르트의 관점에서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늘 이야기되는 베르테르 말고 다른 인물을 파고들면 작품의 색다른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
베르테르가 일으킨 폭풍의 한복판에 선 롯데는 <베르테르>의 초연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해석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를 보며 우유부단하다거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고민에 깊게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이번 25주년 <베르테르>에서 이지혜, 전미도와 함께 롯데 역을 맡은 배우 류인아는 롯데에게서 흔들리며 성장하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런 모습이 작품을 하나씩 쌓아가는 자신과도 닮았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베르테르, 롯데, 알베르트 모두
그들만의 열정을 마음에 품은 인물들이거든요.
<베르테르>는 그들 각자의 열정이 부딪히는 격정적인 이야기죠.”
반갑습니다. <베르테르> 개막 후 일주일이 지났는데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지금은 일상에 <베르테르>밖에 없는 느낌이에요. 공연을 거듭하며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여유롭게 무대 위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흔히 <베르테르>를 ‘베르테르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설명하는데, 롯데 역을 맡은 배우님은 이 작품을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들어보고 싶어요.
보통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하면 아련하고 슬픈 감정이 먼저 떠오르잖아요. 그것도 맞지만, 연기를 할수록 저는 열정적인 작품이라고 느껴요. 베르테르, 롯데, 알베르트 모두 그들만의 열정을 마음에 품은 인물들이거든요. <베르테르>는 그들 각자의 열정이 부딪히는 격정적인 이야기죠. 저희 넘버가 현악기로 연주되어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데, 음악감독님이 늘 말씀하세요. 음악은 부드럽게 흘러도 배우들은 그 안에서 격정을 표현해야 한다고요.
모든 인물이 각자의 열정을 품고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그렇다면 배우님이 본 ‘롯데’는 어떤 인물인가요?
작품을 두리뭉실하게만 알고 있을 때는 롯데가 소설에 나올 법한, 너무 사랑스러워서 만인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연습을 하면 할수록 롯데가 현실적인 인물로 느껴지는 거예요. 유혹에 끝없이 흔들리는 모습이 현실의 우리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죠. 어쩌면 현실 속 인간의 모습을 가장 잘 담아낸 인물일지도 몰라요.
유혹에 흔들린다는 점 외에 또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느껴졌던 부분이 있을까요?
작품 속에서 롯데의 상황을 표현하는 소품으로 ‘금단의 꽃’이 등장해요. 알베르트가 준 꽃으로, 깨버리려 했지만 끝내 깨지 못했죠. 저는 사람마다 자기만의 금단의 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남한테 쉽게 말하진 못해도 스스로는 분명히 그게 뭔지 알고 있을 거예요. 사람이란 그 꽃을 들고 항상 흔들리는 존재인데, 그 흔들림을 겪으며 자신을 다잡고 뭔가를 배우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롯데가 참 인간적인 인물이라 생각했고, 저도 롯데에게서 많이 배웠어요.
어떤 점을 배우셨는지 궁금해요. 롯데와 닮은 점이 있나요?
롯데와 상황은 다르지만, 저도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고 많이 흔들리는 사람이거든요.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고민에 빠지면서도 결국 작품이 끝나면 무언가를 배워가는 모습에서 롯데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갈등과 고민 끝에 성장하는 롯데를 보며 저도 성장하는 단계에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극에서 배우님이 몰입하게 되는 넘버 또는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극이 끝날 때쯤 잠들어 있던 롯데가 깨어나 금단의 꽃을 발견하고 온실에 다시 가져다 놓는 장면이 있어요. 그게 여러 감정과 사건을 경험한 롯데가 성장하는 순간 같아서 깁게 몰입하게 돼요. 다른 배우분들이 이 장면을 연습하는 걸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럴 때면 이 장면을 위해 내가 <베르테르>를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제겐 운명적인 장면이에요.
“오히려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저만의 롯데가 만들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건 지금, 이 나이의 류인아만 표현할 수 있는 롯데죠.”
이번에 <베르테르>에 출연하며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저 무난하게 롯데를 소화했다는 평보다는 ‘류인아의 롯데’가 매력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관객이 저만의 롯데에 공감해 주시고 제가 표현하는 롯데를 와닿는 인물로 느껴주신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공연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럼 ‘류인아만의 롯데’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도 궁금합니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롯데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잖아요. 처음엔 잘 모르니까 우유부단한 모습도 보이고 갈팡질팡하기도 하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거나 지난 선택을 후회도 하고요. 롯데도 알베르트라는 정혼자가 있는 상황에서 베르테르라는 인물과 만나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경험하며 혼란스러워해요. 그게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2013년부터 롯데를 맡아 온 다른 배우들과 함께하는 게 설레면서도 부담이 되었을 텐데, 류인아만의 롯데를 찾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도 들어보고 싶어요.
처음에는 언니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언니들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어요. 워낙 오래된 작품이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롯데의 모습이 이미 정해져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시야를 넓히기도 어려웠고요. 고민하는 절 보더니 연출님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은 제가 연기를 하지 않을 때에도 간직하고 있는 롯데의 모습이 있다고 말해줬어요. 좀 엉뚱한 면,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 같은 거요. 그걸 깎아내지 말고 무대에서 드러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경험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지레 움츠러들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오히려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저만의 롯데가 만들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건 지금, 이 나이의 류인아만 표현할 수 있는 롯데죠. 결국 숨기거나 꾸며내기보다 자신감을 갖고 저를 드러냈을 때 비로소 저만의 롯데가 나왔습니다.
<베르테르>는 격정적이고 애절한 사랑이 극을 이끌어 가는 동력인데, 이러한 사랑에 공감하시나요? 인물들의 감정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상황을 떼어놓고 감정 자체만 보면 공감이 돼요. 베르테르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하면 기분이 초 단위로 변하잖아요. 말 한마디에 금방 행복해졌다가 또 다른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불행해지고요. 사랑에 빠져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제가 원래 대본 보면서 우는 사람이 아닌데, <베르테르>는 읽으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한편으로 알베르트도 대단한 사람이에요.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도 듭니다. 저도 나중에 좀 더 성숙하면 알베르트처럼 무언가를 포용하고 용서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두 사람에 비하면 롯데의 사랑은 좀 더 현실적인 것 같아요.
갈등하는 롯데의 심정에 공감하면서도, 어쩌면 롯데가 베르테르에게 느끼는 감정이 꼭 사랑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제가 본 롯데는 자유로운 감성의 소유자이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와 사회적 지위 때문에 스스로를 억누르는 인물이거든요. 그러다가 자신의 감성을 알아봐주는 베르테르를 만난 것이죠.
베르테르와 롯데가 처음 만나는 ‘자석산의 전설’ 장면에서 주변 귀족들은 롯데의 이야기에 형식적으로 반응하는데, 베르테르만큼은 그 마음을 알아주고 공감해줘요. 롯데는 그런 베르테르에게서 어떤 해방감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 해방감을 사랑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사회에 억눌린 사람이 금단의 영역에 끌린 건 당연한 일 같기도 합니다.
“자극으로 가득한 시대에 <베르테르>는 고요하게 마무리되는 작품으로,
공연 다 보고 돌아가는 길에는 꼭 한 번씩 다시 생각날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스며들지요.”
25주년을 맞은 <베르테르>, 어떤 부분에 유념해서 보면 좋을까요?
25주년을 맞아 관객이 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장면을 수정, 추가했고 대사도 좀 더 명확하게 바뀌었습니다. 저는 공연을 볼 때마다 베르테르, 롯데, 알베르트 등 각각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작품을 보려 해요. 관객분들도 한 인물을 정해서 그 인물을 쭉 따라가듯 감상하면 작품이 끝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거예요. 제가 드리는 감상 팁이에요.
5년 전 <베르테르> 20주년 공연 오디션에 참가해 최종심까지 올랐다고 들었어요. 그때를 기억하시나요?
당시에는 아무 경력도 없는 완전 신인이었는데 최종까지 가게 되어 깜짝 놀랐어요. 음악감독님과 연출님이 편견 없이 주목해 주셔서 감사했고 또 인상적이었어요. 비록 떨어지더라도 다음번에 이분들과 같이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함께하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놀랍게도 음악감독님께서 5년 전의 저를 기억하시더라고요. 또 한 번 감동을 받았죠.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많은 경험이 쌓였어요. 앞서 흔들리면서도 성장하는 모습이 롯데와 닮았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5년 전과 비교해 성장했다고 느끼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더 용감해졌어요. ‘깡따구’가 생겼달까요. 5년 전에는 무언가를 시도하고 싶어도 용기 내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는데 5년간 여러 작품을 하며 단단해진 걸 느껴요. <베르테르>와 함께하게 된 것이 그때가 아닌 지금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5년 전에 정말 운이 좋아서 출연을 했더라도 지금만큼 제가 원하는 대로 롯데를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요.
시간이 흘러 <베르테르>는 훗날 배우님께 어떤 작품으로 남을까요?
류인아라는 배우가 더 단단해진 작품, 함께 성장한 작품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특별히 연기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돌이켜보면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어요. 앞으로도 여러 캐릭터에 도전하며 새로운 옷을 계속 입어보고 싶어요. 정말 예상치 못한 캐릭터, 또는 완전히 예상 가능한 캐릭터도 좋아요. ‘류인아’ 하면 특정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 배우가 맡은 캐릭터가 궁금해지면 좋겠어요. 류인아가 연기한다는 것만으로 그 캐릭터가 궁금해지는 거죠. 그만큼 사람들이 기대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르테르> 관객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자극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베르테르>는 고요하게 마무리되는 작품인데, 공연 다 보고 돌아가는 길에는 꼭 한 번씩 다시 생각날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스며들지요. 이렇게 자극적인 시대에 저희 작품을 보며 느리게 생각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보살펴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