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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에는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많은 문화권의 언어에서 잠을 잘 때 꾸는 '꿈'과 미래에 성취하기를 바라는 어떤 지향점을 뜻하는 '꿈'을 뜻하는 단어가 일치한다고 한다. 그 이유를 학문적 근거를 들어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잘 생각해보면 이 둘이 많은 공통점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무의식과 경험이 기반이 된다는 점, 아직 오지 않았거나 오지 못할 순간이라는 것, 때로는 현실이 아님을 알더라도 아주 달콤하다는 것까지.
"더 폴: 디렉터스 컷(이하 더 폴)"을 볼 때 느꼈던, 어떤 꿈의 경계를 헤매고 있다는 막연한 감상은 영화가 두 개의 꿈이 교차되는 이러한 지점을 짚어냈기 때문이었다. 팔이 부러져 입원한 천진난만한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영화 촬영 중 사고로 입원한 스턴트맨 '로이'를 병원에서 만나, 로이의 말과 알렉산드리아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꿈으로 집약된 예술이었다.
꿈의 끝에 추락하더라도, 나아간다면
"더 폴"에서 꿈은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가 만났을 때 한 사람의 꿈은 저물어 가던 중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현실과 꿈을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했다. 로이는 아마 그의 꿈이었을 장대한 서사시의 멋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빚어냈고 알렉산드리아는 자신이 아는 현실의 사람들로 주역들의 자리를 채워넣었다.
이렇게 알렉산드리아의 상상을 구성하는 재료들이 무엇인지,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서서히 밝혀지는데 이 점이 오히려 환상을 더욱 꿈에 가까운 무언가로 만들어준다. 이는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경험이 섞이면서 완전히 무관해보이면서도 관련 있는 영역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후반으로 갈수록 로이의 이야기는 현실과 간극을 빠르게 좁혀간다. 더불어 두 사람의 현실이 투영되고 섞여 두 사람이 하나의 꿈을 꾸게 되면서 현실에도 관여하는 이야기가 된다. 가령 처음에는 전적으로 로이의 설명에 의존했던 이야기에 알렉산드리아가 계속해서 끼어들면서 두 사람은 이야기를 매개로 짧은 시간에 정신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같은 경위, 추락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다는 공통점을 공유하지만 완전히 다른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유대를 만들어준 것은 우연이 아닌 이런 꿈이었다.
결정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의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로이는 가슴 아팠던 경험과 패배감을 오히려 마주하게 되고 허황된 꿈에서 쉽게 빠져나오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서사의 완결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두 사람은 어떻게든 이야기의 끝을 봐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야기에 몰입한 둘은 서로의 감정에 감화되고 서로의 이야기에서 자신들을 발견하면서 같은 꿈의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렸다. 알렉산드리아가 절망적으로 이야기를 서둘러 매듭지으려는 로이에게 "내 이야기이기도 해요."라고 분명히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은 트라우마를 로이의 이야기에서 치유하고 로이는 추락 사고로 인해 스턴트맨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을 테지만, 알렉산드리아의 "그를 구해주세요"라는 말에 절망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두 사람은 추락을 계기로 만났고 환상의 이야기 속에서 서로의 가장 어두운 꿈을 해피엔딩으로 조금이나마 극복하게 된다.
이런 맥락을 쭉 살펴봤을 때 영화의 제목 "더 폴(The Fall)"도 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 보인다. 두루 적용되는 예시일지 모르나 어린 시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큰다는 말을 들었다. 낙하하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면 그제야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체감하곤 했는데, 때로는 놀라고 무서운 경험 끝에서 성장할 때도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병원에 있고 싶었던 알렉산드리아와 더이상 살아갈 의지가 없던 로이가 이야기를 마무리한 끝에야 비로소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추락의 악몽에서 비로소 벗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계속 바닥으로 떨어지는 감정에 고여 있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환상의 문을 둘은 확실히 건너 온 것일지도 모른다.
"더 폴"은 꿈을 이루어가거나 절망의 끝에 훌륭히 재기하는 막연히 희망적이고 환상적인 꿈이 아니라, 이룰 수 없는 꿈 위에 새로운 꿈을 덧씀으로써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건네주려 하는 듯하다. 어떤 꿈은 그냥 꿈으로 넘겨버리고, 새로운 꿈을 꿔도 된다는 위로를, "더 폴"은 꿈이라는 기승전결로 조심스럽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