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란 어떤 곳인가? 전세계의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일하길 원하는 곳, 수많은 별들이 뜨고 지는 곳. 할리우드는 본디 오래 전부터 꿈과 환상이 가득했던 곳이다.
낭만을 뿌려댄 영화인 라라랜드를 만든 데미언 셔젤. 그가 이러한 할리우드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개인적으로 라라랜드의 그것을 상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셔젤은 난장판이었던 1920년대의 할리우드를 포장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니, 오히려 과장했다. 그럼에도 그런 할리우드를 사랑한다고 아름답게 말하는 듯한 참 아리송한 영화. 이번에 다룰 영화, ‘바빌론’이다.
1. 192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는 1920년대의 할리우드를 다루고 있다. 1920년대는 할리우드에게 격변의 시기였다. 바로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나오듯, ‘재즈싱어 (1927)’라는 첫 유성영화가 개봉하며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무성영화는 옛 것이 됐고 변화하는 현장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감독들과 배우들은 할리우드의 부름을 더는 받지 못했다.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잭 콘레드가 대표적이다. 그의 모티브인 존 길버트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였으나, 발음 문제나 목소리 문제 등으로 유성영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극중 콘레드의 모습과 유사하다. 마고 로비의 넬리 라로이 역도 그러하다. 클라라 보우가 모티브인데, 영화에서 나오듯이 끝장나는 눈물 연기를 선보일 수 있는 그녀였지만, 끝내 유성영화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영화가 이 격변의 시기를 나타내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스타인 잭 콘래드와 그의 직원이었다가 사운드 책임자로 올라서는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를 교차하며 보여줌으로서 시대의 변화를 사실적으로 나타낸다.
그 외에 자막 담당자였던 레이디 페이(리 준 리)가 단숨에 해고되거나 영화를 모르는 음향 담당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감독, 실내 세트장 등 셔젤의 조사가 철저했음을 알려주듯 확실한 고증을 한다.
2. 할리우드라는 이상향
그런 가운데, 끝끝내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안쓰럽게까지 느껴진다. 특히 콘래드가 그러하다. 극중 콘래드는 넬리나 매니와는 떨어져 있는 인물이다. 왜이리 비중있는 인물일까 하는 의문점이 들기까지 한다.
자세히 보면 콘래드는 20년대 할리우드의 의인화이기도 하다. 콘래드가 정상에 서있을 때, 할리우드는 찬란했고 콘래드가 추락할 때, 할리우드는 영화계가 아닌 다른 업계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매일밤이 파티에 난장판인 할리우드의 모습은 콘래드의 불같은 성격과 흡사하기도 하다.
그런 콘래드이기에 엘리노어 세인트 존(진 스마트)에게 지적 같은 위로를 듣는 모습은 영화를 관통하는 장면이다. 당신의 시대는 끝났다고, 그렇지만 당신이 죽은 50년 후에 한 아이가 당신의 영화를 본다면 당신은 계속 기억되는 거라고, 그러니 이제 내려놓으라고. 할리우드 그 자체였다가 자신의 이상향에게 버려진 콘래드처럼 영화 속 주요인물들은 각자 관철하는 뜻이 다르다. 그리고 후반부에 다다르면 이들의 모습은 다르게 보인다.
존 콘래드: 자신의 이상향을 만들어낸 자 → 이상향에게 버려진 자
넬리 라로이: 이상향 속에 들어가려는 자 → 이상향에게 버려진 자
매니 토레스: 이상향을 만들고픈 자 → 이상향을 만들어내는 자
시드니 팔머: 이상향을 동경하는 자 → 이상향을 뿌리치는 자
이처럼 각자 할리우드라는 이상향을 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할리우드를 품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할리우드를 떠난다.
그리고 이 광경은 셔젤이 할리우드를 어떻게 들여다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중 하나는 바빌론이라는 영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바빌론에는 과거에 존재했다는 공중정원이 있다. 그러나 그곳의 흔적이 거의 없다보니 학자들은 실존 여부조차 파악하기 힘들어 한다. 이 점이 할리우드도 바빌론과 비슷하다는 점을 셔젤은 말하고 싶어한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공중정원같은 할리우드임을.
또 한 가지는 결점이 없는 듯한 스타들이 집결한 할리우드는 사실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전쟁터이며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이쯤 되면 할리우드를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그려낸 의도가 궁금하다. 단순히 감독의 성향이라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 셔젤의 의도는 영화가 후반부에 드러서면서 나타난다.
3. 헤이트레터 같은 러브레터
초반부로 다시 돌아가보자. 영화는 초반 15분 정도간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막강한 비주얼과 연출, 뛰어난 음악으로 단숨에 20년대 할리우드라는 무대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그러나 비위가 약한 사람은 무리일 수도 있을 만큼 매우 섹슈얼하고 더럽기까지한 모습들이 곳곳에 자리매김해있다. 마고 로비의 매혹적인 표정과 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초반부뿐만 아니라 영화는 내내 파티 장면들을 잡아준다. 넬리와 넬리의 아버지가 뱀과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장면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더 나아가 후반부에 갱 두목인 제임스 맥케이(토비 매과이어)가 나오는 장면은 아예 할리우드가 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듯 묘사하기도 한다. 살아있는 쥐를 먹는 괴상한 인간을 가리키며 ‘스타는 되는 게 아니라 타고나는 거야’ 라는 넬리의 대사를 매니에게 똑같이 말하는 맥케이나 철창에서 결투와 섹스가 벌어지는 것을 환호하는 구경꾼들 등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할리우드를 향한 찬가다. 넬리가 매니의 도움으로 참가한 부자들의 파티에서 알 수 있다. 넬리는 재력으로 영화인들을 깔보는 듯한 이들의 비위를 맞춘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의 버릇을 못고치고 그들의 얼굴에 토를 함과 동시에 놀리며 돌아선다. 그 장면은 왠지 통쾌하기까지 하다. 고상한 척 하지만, 토끼 털을 목에 두르고 있는 등의 행동보다는 솔직하게 모든 것을 내보이는 영화인들을 응원하게 된다.
핵심으로 마지막 장면이 그것을 가리킨다. 오랜만에 LA로 돌아온 매니는 극장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를 관람한다. 이 영화는 본 영화 내에서도 수많은 장면들이 레퍼런스가 돼있을 만큼 중요한 위치에 서있다. (가령 콘래드가 자신의 영화에서 ‘i love you’ 대사를 여러 번 외치자 관객들이 비웃는 장면.) ‘사랑은 비를 타고’는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20년대의 할리우드에서 펼쳐지는 두 남녀의 사랑이 주내용이다. 마치 본 영화의 매니와 넬리의 사랑처럼.
이윽고 매니는 자신이 살던 시대가 배경인 이 영화를 보며 그 때의 처량했던 자신이 떠오르는 듯, 넬리가 그리운 듯 오열한다. 그 순간, 영화는 잠시 다른 세계로 빠진다. 제3세계에서 우리가 흔히 봤던 장면들을 보여준다. 오즈와 마법사, 스페이스 오디세이, 메트릭스, 아바타 등과 같은 영화사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영화들의 한 장면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마침내 매니는 웃는다. 자신이 쏟은 열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 흐름 중에 일부임을 깨달은 듯. 마치 브래드 피트가 엘리노어에게 들은 ‘네 시대는 끝났지만, 넌 50년 후의 아이에게도 기억될 거야’ 라는 말 처럼. 온전히 한 명의 관객으로서 영화를 관람하는 매니의 얼굴을 보여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즐거움을 누린다. 꿈을 꾸게 되고 그 꿈들이 모여 할리우드를 이룬다. 아무리 악습과 전쟁이 되풀이되는 곳이더라도 사람들은 그곳을 동경하고 항상 다음을 기대한다. 바로 영화라는 존재 때문에. 그 힘은 실로 엄청나서 난장판이었던 영화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도 사람들은 환호한다. 매니가 이 사실을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며 깨달은 것 처럼, 필자가 바빌론을 보고 알아차린 것 처럼, 사람들이 매트릭스나 아바타 등을 보며 알게 된 것 처럼.
그리고 그 누구보다 데미언 셔젤은 이를 확고히 알았고 그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모든 부분을 감싸안을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어쩌면 다들 소박한 꿈을 꾼 자들일 지도 모른다. 매니는 그저 넬리의 춤을 다시 보길 원했고 넬리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며 콘래드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계속 하고 싶었을 뿐이고 시드니는 재즈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여러 사람들의 꿈과 열정이 모인 그곳, 할리우드. 어떤 이는 자살할 만큼 그들 모두 진심이다.
할리우드란 어떤 곳인가? 전세계의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일하길 원하는 곳, 수많은 별들이 뜨고 지는 곳. 할리우드는 본디 오래 전부터 꿈과 환상이 가득했던 곳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이루는 자들의 진심이 자신들이 즐거워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알기에 그토록 어지러진 영화판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일 지도. 그 진심을 일말의 꾸밈도 없이 보여주는 영화라 그럴까.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 데미언 셔젤의 필름 무비, 그녀의 인생작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마고 로비, 신예 디에고 칼바는 이 영화의 영광 중 일부에 불과하다. 막바지에 다다르면 3시간 8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아쉽다고 느껴질 만큼 더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