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쩌다 '말'이 '말'을 먹어버렸을까? - 착한 대화 콤플렉스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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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사용에 민감성을 가지고 있는 터라 같거나 비슷한 의미의 단어일지라도 사소한 의미적 차이를 살피는 편이다.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말의 의미가 왜곡되지 않도록 대화하고 싶어서였다. 한 번 내뱉으면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옛말처럼 나는 ‘말’이 가진 힘은 크다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일상과 매체에서 전하려는 ‘말’에서 쓰는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 대화와 말투. 생각을 거쳐 입 밖으로 내뱉는 데 있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듯 보이는 태도까지. 상대가 불편해할 단어일 수 있음에도 떠오르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내뱉어버리는 경우를 보았다. 말을 듣고 있자 하니, ‘저 상황에서 저 단어를 선택해서 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의지를 넘어선 타인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만은 조금 더 좋은 단어를 선택해서 말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과 아무런 인지조차 못하는 것에 대한 허탈감도 느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배울 점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또,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상대가 상처를 입거나 내가 사용하는 단어나 말은 안녕한지 되돌아보며 정돈하곤 한다.
이를테면, ‘(상대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 게 가장 좋을까?’하며 생각 리스트를 나열해 두거나 이 말을 건넸을 때의 반응에 대해 시나리오를 생각하면서 다음에 할 말을 얘기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해도 될 말들을 여러 생각 과정을 거쳐 말하는 것에는 ‘내가 이 말을 건네면 혹시 상대방은 불편해하지 않을까?‘와 같은 우려 아닌 우려에서 오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생각 투사기(?)’라는 기막힌 발명품을 만들어내서 생각을 스캔할 수 있다면 분명 내 옆에는 말풍선처럼 펼쳐진 생각 리스트가 보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안에는 최소 3개 이상이 넘어가는 경우의 질문과 답변이 나열되어 있을 것이다. 어떤 말을 할까 곰곰이 분류 작업을 거치다, ‘통과!’라는 느낌표가 들면 상대에게 하나씩 대화를 이어나갈 주제나 답변을 꺼내놓으니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타인과의 의사소통 그러니까 말을 잘 이어가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시작된 후부터였다. 좋은 점은 좋은 대화가 오고 간다는 것이지만 때로는 일상의 대화조차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고민하며 말하는 모습을 스스로 느낄 때도 있다. 나름 떠올린 ‘생각 리스트’에서 ‘이 말은 지금 상황에서 아닌 것 같아.’ ‘이 말은 빼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지우고 나면 어느샌가 할 말이 없어질 때도 있어서다. 말을 잘해보려 한 것인데 도리어 말이 말을 먹은 셈이다. 그렇다 보니, 언젠가 이 경험을 하면서는 점점 말하는 게 조심스러워지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였는지, 더더욱 ‘말실수가 두려워 말수를 줄이는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적인 책 표지와「착한 대화 콤플렉스」라는 제목에도 눈길이 갔다.
이 책의 저자는 책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즉, 혐오의 언어로 번져가는 말들 속에서 세상에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에 대해, 말 한마디와 글자 하나로 빠르게 단절되어 버리는 현상에 대해 지적한다. ‘쓰지 말아야 할 단어‘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위치해 있는 곳은 어디인지 물음을 던지기도 하고, 이러한 단어의 본질에 대해 알아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공감‘에 죽고 사는 한국 사회, ‘노인‘을 둘러싼 다채로운 시선들, ‘아줌마’의 명암, ‘라테와 꼰대’의 비하인드와 같은 이야기도 짚어본다. 또한, 단어에 담긴 편견, 반전 그리고 새로운 시각들을 사례를 풀어 소개한다. 마지막으로는 이 책을 덮고 난 이후의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이정표도 제시한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단순합니다. 이유도 없이 모르는 사람을 미워하는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틀딱, 노인충, 한남, 한녀, 급식충, 맘충, 개저씨와 같은 영역으로 내몰리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혐오의 언어로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진 세상에 온전하게 남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말 한마디, 글자 하나로 단절은 빠르고 쉽게 이루어지지만, 그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는 데 희망을 걸어봅니다.”
- 16p
책의 여러 부분 중에서도 인상 남은 것은 2부 ‘말은 잘못이 없다. 쓰임이 잘못됐을 뿐‘였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공감‘에 대해 묻는 부분이 그랬다. 사례로는 고객센터 상담원의 업무적 공감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는데 공감과 호응이라는 이름 아래 가해지는 업무적 감점 사항 이를테면, 공감 호응에는 숨소리와 침묵, 토씨 하나까지 포함되며 숨소리가 조금이라도 커서 한숨처럼 들리거나 침묵이 3초 이상 지속된다거나 기침이나 딸꾹질 또는 통화 중에 물을 마시는 행동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을 언급했다. 더 나아가, 고차원 공감 호응이라는 생일, 계절 변화, 관혼상제와 같은 고객님의 정보를 알고 있다면 그에 대한 공감을 전화 상으로 언급해야 하는 업무적 과중도 꼬집었다.
즉, 이는 ‘진정한 공감’에서 벗어난 ‘정해진 공감’에 불과한 것이다. ‘공감’이라는 것은 사실 함께 공, 느낄 감을 써서 다른 사람의 감정, 의견 또는 주장에 대해 자신도 그렇다고 느끼는 기분이지 않은가. 정해진 멘트와 규칙으로 ‘진짜’라는 반복적인 말과 함께 섞인 ‘공감’을 두고 진정한 공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우러나오는 공감이 아닌 갈구하거나 또 강요하는 공감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한국에서 소비되고 있는 ‘아줌마’의 단어에 대해 살펴보면서 ‘아줌마’의 명암을 살펴봤다. 우리에게 ‘아줌마’란 어떤 의미일까. ‘아줌마’는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데 그 이유에는 우리가 인지하는 ‘아줌마’가 가진 어감에서 오기 때문이다. 즉, 중년 이상의 여성을 낮춰 부른다거나 예의 없게 들려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체어로 보통 ‘아주머니’ 혹은 ‘선생님’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아줌마’라는 단어 자체가 사전적으로 비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이를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책에서는 ‘아주머니’와 ‘아줌마’의 의미를 비교하며 사전적 의미를 설명하는데 ‘아주머니’에 비해 낮추어 부르는 말이지만 단지 ‘아줌마’는 나이 든 여자를 가볍게 또는 다정하게 가리키거나 부르는 말이자 결혼한 여자를 일반적으로 부르는 말에 불과했다.
나이에 민감한 우리 사회, 나이 하나로 서열을 매기거나 우위에 선다고 생각하는 문화, 빠른 년생과 음력 또는 양력인지를 따지는 문화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나이에 대한 표현들은 ‘아줌마’라는 단어를 단어 그 자체가 아닌 사회가 만든 단어의 의미로 바꿔 금기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뉴스 기사에서 조차도 드러나는데 ‘아줌마’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나열해 헤드라인으로 올려 ‘아줌마’라는 의미가 저절로 경멸의 언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빌라 복도에서 밥하고 살림 차린 아줌마... 불나면 어쩌죠. 주민 불안’
이 기사는 ‘고발 행위’에 초점이 맞춰지는 대신 ‘밥 하고 살림 차린 아줌마’라는 관용적인 표현에 초점을 두었다. 여성이 집 밖으로 나온 순간 불특정 다수로부터 ‘집에서 밥이나 할 것이지 왜 밖으로 가어 나와서’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오가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아줌마 - 밥 - 살림’은 하나의 세트처럼 자연스러운 구성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 129p
하지만, 반대로 ‘아줌마’로 보이는 경멸적 시선 말고 억척스러움과 엉뚱함, 단순하고 정이 넘치는 모습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예찬해 주자는 시선도 있다. 억척스러움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어주는 정. 일례로, 대중교통을 타며 무거운 가방을 들고 앞에 서 있을 때 나의 경우에는 간혹 “학생, 가방 여기다 놓아도 돼.”라고 말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곤 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말속의 의미와 표정, 행동을 통해 어느샌가 감사함과 따뜻한 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아줌마'라는 의미에서 본 명과 암.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며 전형적인 ‘아줌마’를 연기한 ’랄랄‘이 떠올랐다. 그리고, 역시나 이를 책에서도 나왔다. 거의 170만 명 구독자 수를 보유한 ‘랄랄’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연기해 온 유튜버로 인기가 절정에 이르고 있다. 특히, 만삭이 되었을 때는 자신의 체형을 살려 대한민국 50-60대 이상 아줌마를 대표하는 모습으로 즉, ‘이명화’ 캐릭터로 변신했다. 솔방울 같은 붉은 곱슬머리와 색이 빠져 푸른색이 된 눈썹 문신, 도드라지는 입술과 목주름 그리고 화려한 꽃무늬 등 패턴의 옷으로 꾸미고, 휴대폰 지갑 케이스를 사용하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케이스가 얼굴의 반을 가리는 모습. 구수한 말투와 능청스러운 모습 등 실제 우리가 익히 볼 수 있을 법한 ‘아줌마상’을 그려냈다.
목욕탕, 원룸, 문방구 등 주인으로 다양한 상황극을 연기하며 아줌마의 모습과 말투, 행동이나 제스처를 기막히게 따라 하는 모습까지.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에 열광했고 엄청난 조회수를 만들어냈다. 또한, 이로 인해 팝업 스토어나 음원 발매까지 이어지며 지금도 그 인기가 가시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이명화’를 연기한 랄랄의 영상이 유머러스하고 중독성 있어서 보게 됐는데 댓글을 보다 예전에는 이러한 아줌마의 모습에서 불편감을 느꼈다면, 지금은 ‘이명화’로 생각하며 친근감을 가졌고 웃어넘길 수 있었다는 댓글도 보게 됐다. 과장된 면도 모두 대변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아줌마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모습도 공감을 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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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노인’이라는 이름의 타자화에 대해서 말했다. 2024년 7월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섰다. 당초 예상했던 연도에 비해 초고령사회의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노인 인구가 증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노인’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과 호칭에 대한 다양한 의견 차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고령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을 두고 보는 한 단면으로는, 노화에 대한 거부감, 노인에 대한 동정 및 혐오의 시선 등으로 부정적인 시선 또는 타자화하며 먼 미래인 양 거리를 두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누구나 일정 나이가 되면 ‘노인‘을 경험하게 된다. ‘노인’을 노인이라 불리고 부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며, 다른 단어로 ‘어르신, 선생님’과 같은 대체어가 등장하는 현상. 앞서, ‘아줌마’라는 단어 또한 그렇듯 ‘노인’이라는 단어 또한 단어를 생각하고 정의 내리는 것에서 우리는 너무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거리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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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말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자는 다양한 이야기와 예시를 드는데 그중에서도 부정적인 언어가 사라진 세계를 소개하며 우리나라의 충청도 지역과 일본의 오사카 지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챕터에서 소개된 사례들은 언급했던 사례 중에서도 읽으면서 웃음을 일으켰던 부분이었다. 날이 선 언어로 상대를 폄하하는 말이 아닌 승자와 패자가 없는 대화를 소개한다.
충청도식 화법과 오사카식 화법이 그렇다. 먼저, 충청도식 화법은 돌려 말하기 화법, 간접적 화법, 의중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답답함을 일으킬 때도 있지만 특유의 화법이 주는 시사적 메시지는 현명 내지 선명하다. 느린 말투로 불편함과 서운함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쉽게 금지나 부정의 언어 화법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진 찍어주는 이가 한참 뜸을 들이면 천천히 말한다. ’ 이러다 영정 사진 되겠소~를 느리게 출발하는 앞차를 보며 이유를 찾고, ‘신호등 색깔이 맘에 안 들어서 그려~‘를, 폭우 속 택시를 타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기사에게 ‘감사합니다, 기사님‘이라 인사를 건네자 기사는 ‘아이, 선장이라고 불러~‘라고 대답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오사카식 화법으로 책에서는 바지 지퍼가 열린 상황에서의 오사카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본다. 대체로 반응은 놀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일부러 열어둔 건데?’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모습이 폭소를 일으킨다. 농담과 진담을 구분할 수 없는 화법이지만 재미에 초점을 맞춰 대화를 유쾌하고 여유롭게 넘어간다. 물론 대화의 전부를 익살스럽게 목적을 두진 않지만 사실이나 진실을 전달함에 있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화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대화를 웃음으로 승화하고 쿠션어를 넣어 상대도 나도 유연하게 소통할 수 있는 화법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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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우리가 마주하는 불편한 단어들에 대해서 되짚어보았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에서 혐오나 차별을 일으키는 단어들은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그릇된 시선 편견을 유도하는 프레임들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언어에는 양면성이 있다. 우리가 잘 사용하면 말은 의미를 확장시켜 주며 소통의 열쇠가 되기도 하지만 프레임과 차별과 소외 등에 도리어 말에 갇혀버리기도 한다. 나와 다른 상식과 모습을 지녔다고 해서 그들에게 어떤 프레임을 씌우고 정의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고 단어 사용에 예민함을 기할 필요도 있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자유가 타인에게는 부자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실수가 두려워서 말수를 줄이기 되는 우리의 자화상을 살펴보며 중요한 것은 저자의 말처럼 언어에는 다의성과 모호성이 필요하고, 언어 안에서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 자유를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착한 대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진정한 대화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윤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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