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하고 우연히 미용실 맞은편에 있는 건물을 봤다. 저런 건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주택가 사이 위치한 건물의 외형이 독특했다. 저런 건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진행 중인 전시가 있는 갤러리였다.
나는 우연을 좋아한다. 우연이라는 단어는 모음으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보니 부드럽기도 하고. 이응 ‘ㅇ’이 들어간 단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갤러리 운영 시간이 30분 남짓 남은 저녁 시간에 나는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다 내려오고서야 전시장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 세이 예지 (Yeji Sei Lee)의 개인전 <찬란한 빛에 서린 목소리>는 10월 17일부터 11월 24일까지 에브리데이몬데이 갤러리에서 관람할 수 있다.
이 세이 예지는 1995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이민자 2세다. 독일 교환학생 시절 만난 한국 유학생들을 통해 자신의 출신과 정체성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작가 본인과 어머니, 할머니 사이의 내면적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번 전시 역시 그 탐구의 연장선이다.
작가의 할머니는 부산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이모는 현재까지도 식당을 운영 중이다.
지하 1층에서 시작된 전시는 5.6mX2m의 대형 캔버스를 첫 작품으로 나를 압도했다. 작품명은 < Call me by name > (2023). 2018년에 개봉된 < Call Me by Your Name >이라는 퀴어 영화가 생각나기도 했던 제목이었다.
작가는 여성의 노동과 삶을 소문자의 역사에 비유했다. 가사 노동과 양육 같은 노동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경제활동이 아닌 것은 전부 노동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 온 노동들. 이러한 여성의 삶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자 하는 이 예지 세이의 전시를 계속 이야기 해보겠다.
작품은 마치 추운 겨울날 자동차 안에서 차창 너머로 보이는 시장 풍경을 그대로 그린 것만 같았다. 일렁이는 뜨거운 증기 때문에 차창에 김이 서린 것 같고, 일렁이는 불빛은 홍콩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색깔은 알록달록하니, 해산물들이 가득 담겨있는 빨간 다라이(대야)가 빨강의 주된 이유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이것. <수조의 패치워크>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어서,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내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동그란 빨간색 다라이(대야)가 가득하고, 초록과 파랑의 수조에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있다. 패치워크를 열심히 그리는 고등학생 소녀의 장면만이 기억나는 제목 불명의 일본 영화가 떠올랐다. 이것 역시 비슷한 감각을 주기는커녕, 전혀 다른 감각을 주는 각자의 작품이지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것은 보는 이의 뛰어난 재능이라고. 미감 뛰어난 사람이 모든 사물을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구조 속에서 미학을 찾아내는 것 또한 재능. 나는 이런 예술가들의 ‘미감’을 훔치고 싶은 욕망을 종종 억누른다.
이 세이 예지의 개인전 <찬란한 빛에 서린 목소리 In vibrant hues, their voices laid>는 뜨거운 증기 속 웅성대는 시장통 소음이 들린다. 갤러리가 고요해서 오히려 아쉬울 지경이었다. 사람이 많은 낮이었다면 좀 더 북적대는 와중에서 전시된 작품들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해당 전시는 혼자 감상을 느끼는 것도 추천하지만 친구들과 여럿이 감상을 나누며 속닥일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