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언어 덕질의 끝에는 -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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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은 날은 좀 웃기는 날이다. 카페에 가서 사이토 뎃초의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를 읽었다. 절반쯤 읽다가 그건 덮고 이번에는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독본>을 또 절반쯤 읽었다. 둘 다 일본인 저자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자신이 없어 예정에 없던 외식을 하기로 했다. 그냥 집 앞에 있는 라멘집에 흘러 들어가서 일본 라멘을 먹고 있으니 일식집이 으레 그렇듯 일본 노래가 들렸다. 젓가락질을 하다가 불현듯 이렇게까지 일본일 수 있나(?)라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그날 카톡으로 대화를 나눈 상대는 일본어 시험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일본 작가의 책을 두 권 읽다가 일본 음식을 먹으며 일본 음악을 듣는 게… 뭐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서도. 좀 재밌는 우연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귀가했다. 사실 일본 문화는여러 방면으로 한국에 스며든 채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독특할 건 아니지.
그런데 더 웃긴 건 그날 밤에 침대에서 책을 읽는데, 아멜리 노통브의 <배고픔의 자서전>이라는 책을 골라버린 것.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그냥 벨기에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만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아니 이 책은 일본에서 시작해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일본으로 끝나는 책이었다. 왜 이런 우연이.
이 기묘한 우연의 처음과 끝을 채우는 두 책 모두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데, <배고픔의 자서전>은 일본과 사랑에 빠진 벨기에인의 이야기라면, <뭐든 하다 보면 뭐가 되긴 해>는 루마니아와 사랑에 빠진 일본인의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마니아'어'와 사랑에 빠진 자칭 히키코모리 일본인 사이토 뎃초의 이야기다. 원래도 영화광이었던 그는 우연히 루마니아어를 다루는 루마니아 영화를 보고, 첫눈에 반해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 상황을 설명하는 저자를 보고 있자면 정말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아니면 첫귀에 반했다? 어쨌든.
그는 일본에 두세 권밖에 없는 루마니아어 책과 인터넷으로 만난 루마니아인들을 통해 언어를 배운다. 그의 수준은 어설프게 일상 회화 정도를 구사할 수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 소설을 쓸 지경에 이르고, 루마니아의 문단과도 연을 이어가며 공부와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간다. 그의 뜨거운 열정이 너무 존경스러운 나머지, 내 덕질 열정이 조촐해 보여 괜히 의기소침해질 정도다.
이 내용이 자세하게 나오는 책의 전반부 이야기도 충격의 연속이지만, 뒷부분의 내용이 더 흥미롭다. 다른 언어와 비교를 하면서 나의 언어가 혹은 상대의 언어가 얼마나 차별로 물들어 있는지 느끼는 장면이나 집필과 번역 사이를 고민하는 과정을 나도 똑같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집필과 번역을 고민하는 건 당연히 나의 진짜 경험은 아니고, 프랑스어와 영어를 둘 다 자연스럽게 써서 둘 모두로 창작 활동을 했다는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이 불문학인지 영문학인지 너무 궁금했다.
난 약간의 ‘원작병(무엇이든 원작을 읽고 싶은 병, 어떤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영화에 앞서 소설을 먼저 읽고 싶다, 또는 외서에서 뜻이 모호한 문장이 나오면 내가 원어를 알든 모르든 일단 원문을 찾아본다)’을 앓고 있어서 그 연장선상으로 번역 작품을 읽을 때도 중역을 거치지 않은 작품을 읽고 싶었다. 사실 이건 외서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신경 쓰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베케트가 같은 작품을 영어로도 내고 불어로도 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괴로움으로 몸부림쳐야 했다. 아니 그래서 처음에 쓴 게 뭐냐고요. 당시에는 그래도 베케트의 모국어는 영어니까 그의 사고방식도 영어를 바탕으로 할 테니 영어가 근본(?)이리라 생각하고 영어를 번역한 버전을 읽었다.
내 이론대로라면 저자의 소설을 읽을 때 본연의 맛을 느끼기 위해 루마니아어 버전이 아니라 일본어판을 읽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에게 소설 집필은 일본어로 쓰기 시작하지만 루마니아어로의 번역을 포함하고 있는 활동이다. 루마니아어로의 완성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기 때문에 루마니아어도 분명 ‘원작’이다. 회화로 예를 들자면 처음 스케치를 연필로 했다고 해도 수채 물감으로 완성하면 그건 수채화지 데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니까 “문장의 의미나 어휘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일본어와 루마니아어 전부 다 오리지널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다.
(p.196)
두 가지 오리지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데서 이미 환상적이지만, 그는 두 오리지널이 동일하지 않음을 명시한다는 점에서 더 환상이다. 만약 그가 일본어의 문장을 일대일 대응하다시피 하며 직역한다면, 그건 일본어만이 오리지널인 작품이 될 것이다. 만약 그가 일본어로 창작한 소설을 루마니아어에 완벽하게(는 불가능하겠지만) 의역한다면, 그건 루마니아어가 오리지널인 작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의역을 충분히 하면서도, 일본어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까 수채화를 완성하다가도 흑연이 필요하면 곧장 연필을 쥐는 셈. 본인이 작가이자 번역가이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폭력적인 창작이다. 부러워라.
사람들은 외국어를 할 때 원어민 같은 완벽함을 추구하는데, 내 목표는 그게 아니다. 나는 외부인이기에, 언어 이민이기에 할 수 있는 것으로 한 방 먹이고 싶다. 완벽함 같은 것은 오히려 내다 버렸다. 나만의 루마니아어를 만들고 싶다.
이 여정은 아마도 평생이 걸려도 끝나지 않겠지.
그러니까 굉장히 두근거린다.
(p.197)
언어 덕질에 끝이 있다면 원어민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생각할 텐데, 저자의 목표는 그것이 아니다. 일본어를 모국어로 가진 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루마니아어를 구사하며 자신만의 루마니아어를 만들겠다는 것. 일본어에서는 일상적으로 쓰는 ‘악마적으로’라는 강조 표현을 쓰는 데 두려움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흔히들 ‘번역투’로 통하는 그 문제점을 그는 자신의 개성으로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도 유난히 일본어의 어감이 살아있는 것 같다. 저 위에 인용한 부분의 마지막 문장, ‘그러니까 굉장히 두근거린다’는 것도 따지자면 ‘일본어스럽다’. 우리 표현으로 옮기자면 ‘그래서 더 설렌다’ 정도가 자연스러울 듯하지만, 그래서 더 설레는 사람은 사이토 뎃초가 아닐 것이다. 사이토 뎃초는 그러니까 굉장히 두근거리는 사람.
이 책이 불러오는 우연은 이대로 끝나지 않을 셈인가. 지난번에 책을 절반 읽고 나머지 절반을 읽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 그사이에 난 서점에 갔다가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를 뒤적이다 왔다. 다른 책을 먼저 사버려서 그 책을 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도서관에서는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영원회귀의 신화>를 빌려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둘이 루마니아인인 줄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마저 다 읽으면서 그 둘 모두 루마니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뭐지? 이 책을 저번에 펼쳤을 때는 운명의 힘이 날 일본으로 끌어들이더니 이번에는 루마니아로 인도한다.
하지만 안 돼. 우리 집에는 내가 독일어 알파벳을 처음 배울 때 샀지만 아직 한 장도 넘어가지 못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서가 고이 잠들어 있단 말이다.
[김지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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