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력 제로, 유연성 제로, 끈기 제로. 그래도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예쁜 레오타드와 스커트가 입어보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시작한 성인 발레. 헬스는 부담스럽고 필라테스는 질린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Lesson 1. 턴 아웃(turn out)
*턴 아웃 : 발끝이 몸보다 바깥쪽을 보도록 선 자세. 발레의 모든 동작의 시작이자 기본이 된다.
작년까지만 해도 어떤 음식을 먹든지, 운동을 하든지 말든지 상관 없이 몸 상태가 적정수준으로 비슷했다. 언젠가는 헬스를 하거나 필라테스를 하는 친구들이 몸짱이 되기 위해서 운동을 하는 대단한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른이 돼서 시작한 운동은 살기 위해, 혹은 현상 유지를 하려는 것이란 걸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올해 초, 다리 관절이 자주 아프고 몸과 정신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스스로 느꼈다. 추우면 집 밖에 나가기 싫어했고, 끼니를 거르는 건 일상이었다. 그래서 인생 첫 운동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땀 흘리고 움직이기를 귀찮아하는 내게는 아주 큰 결심이었다.
여러 운동을 고민하던 때 내가 후보에 둔 운동은 발레, 테니스, 필라테스. 기준은 다리가 자주 아팠기 때문에 유연성과 근력을 함께 기를 수 있을 것, 운동 초보자인 내가 꾸준히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재미가 있을 것, 그리고 운동복이 예쁠 것. 이 세 가지였다. 결국, 이 조건들에 모두 부합하면서도 운동복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발레를 선택했다. 유연성도 근력도 끈기도 없는 내가 파스텔톤의 레오타드와 스커트만을 기대하며 이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옳을지 고민이 되었지만, 주위에서 발레를 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칭찬에 한편으론 매우 설렜다. 클래식 음악에 맞춰 우아하게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안무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건 나의 편협한 사고에서 기인한 환상이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한편에서는 ‘다 늙어서 왜 발레를 하느냐?’, ‘발레는 전공을 하거나 초등학생 어린이들이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위축되기도 했지만, 깊은 생각 없이 찍어 먹어 보는 게 최대 장점인 나는 일단 학원으로 달려가 카드 결제를 해버리고 말았다. 생각 주머니가 늘어지고 고민이 머릿 속을 맴돌 땐 일단 시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Lesson2. 플리에(Plié)
* 플리에 : 턴 아웃을 한 자세에서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동작. 이때 상체와 골반을 앞으로 곧게 고정하여 하체와 함께 꺾이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하자.
처음 도착한 발레학원에는 나와 달리 태어날 때부터 발레를 하려고 태어난 것 같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목이 길고 팔과 다리가 가늘어 마치 백조 같았다. 그에 비해 나는 난생처음 하는 발레 동작이 어색해서 갓 태어난 기린이 백조 흉내를 내는 것처럼 기묘했다. 그리고 가장 놀라웠던 건 발레가 땀을 적게 흘리며 고상하게 움직이는 운동이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백조는 물 아래서 발을 쉬지 않고 움직인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 정도로 근력이 중요한 운동이라고는 해보기 전엔 몰랐을 것이다. 한 친구는 내게 ‘발레를 하면 종아리에 알이 생기진 않냐?’ 물어보기도 했다. 찾아보니 본인의 근육이 붙는 체질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사실 일주일에 2번, 70분씩 하는 정도로는 근육이 생기기 어렵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은 근육이 생기기 전, 근육을 만들 힘을 기르는 정도로 족하다.
근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발레의 기본이 ‘바른 자세’이기 때문이다. 발레 동작을 따라 하기 위해서는 유연성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자세를 취하고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매일 주문처럼 듣는 말들이 있다. “어깨 내리고, 골반을 앞으로, 다리는 턴 아웃, 목은 길게 빼서 시선 저 멀리하세요.”, “허벅지 안쪽에 힘줘서 다리 더 들어 올리세요.” 처음 피아노를 배우러 갔을 때 손가락을 세우라는 선생님의 잔소리 같았다. 어째 매일 듣는 말인데 신경을 쓰지 않으면 금방 흐트러진다. 좋은 자세를 유지하는 건 어쩌면 몸의 일 이상의 정신 수양 아닐까.
그래서 발레라는 운동이 나에게 더욱 맞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든 꼼꼼히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나에게 한 동작, 한 동작 제대로 된 자세로 완성하길 요구하니 이보다 필요한 훈련이 없다. 눈에 띄게 빠르고 강한 운동은 아니지만, 밤중에 피는 꽃처럼 은은하고 온전한 운동이다.
Lesson3. 파세(Passé)
*파세 : 한쪽 발을 반대쪽 다리의 무릎에 가볍게 갖다 대며 다리로 삼각형을 만드는 동작. 완벽한 삼각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릎이 바깥쪽을 향하게 팽팽하게 당기며 척추를 길게 만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모든 동작을 발레 바에 양손을 올리고 시작한다. 엄지손가락이 바 아래로 오지 않게 살포시, 무게중심을 싣지 않을 정도로 그러쥔다. 바가 나의 생명줄이라도 된 양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가뿐히 동작을 따라 하는 사람들을 보다 센터의 전신거울을 통해 나를 보면 서커스 곡예사가 따로 없다. 이런 내 모습을 선생님과 같은 반 수강생들에게 보이는 게 무서워서 아침 발레를 위해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천근만근이었다. 발레 수업이 있던 어느 날은 일어나기 전에 꿈을 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이 인터뷰하고 있는 상황을 관찰자 시점에서 보았다. 인터뷰 내용은 그 연예인의 몸 관리 비결이 발레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럼 나도 발레하러 가야지!’라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 한 몇 분 동안 그게 사실인 줄 알고 기쁜 마음에 나갈 채비를 했다. 개꿈이었다. 내 동작을 남들에게 보이는 일이 나에겐 생각보다 부담감이 큰 일이었나 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세가 완성되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인다. 골반의 방향이 잡히고, 다리와 발끝의 각이 살아난다. 어느 순간부터는 바에서 손을 떼도 중심이 잡힌다. 그럴 땐 내가 진짜 운동을 제대로 하고 있구나 뿌듯하다. 누가 보면 한 작품의 안무라도 완성시킨 양 자신감이 차오른다. 그래도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작은 성취에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운동의 묘미 아닐까? 막 걸음마를 뗀 아기는 걷다가 넘어져도 두 발로 잘 설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칭찬을 받는다. 그렇게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나 또한 한 동작에 성공해도 바에서 손을 떼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성공을 발판 삼아 연습할수록 지속시간이 늘어난다. 작은 성취의 기회들이 많은 발레는 초심자들에게 좋은 운동인 것 같다. 많은 기초 단계를 거쳐야만 우리가 알고 있는 우아한 발레리나의 모습이 나오지만, 그 과정까지 자신감을 심어주는 크고 작은 퀘스트들이 흥미를 붙이게 한다.
Lesson4. 피루엣(pirouette)
*피루엣 : ‘빙빙 돌다’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로, 한쪽 다리를 중심축으로 팽이처럼 회전하는 발레턴. 몸이 가는 대로 자세를 잡고 돌면 되는 거 아니냐고 쉽게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상상 속에 바라는 힘 있지만 부드러운 턴을 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돌고 돌아야 한다.
연한 살구색에 리본으로 묶인 토슈즈는 내 로망이었다. 작고 예쁜 토슈즈를 신고 점프를 하고,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휘날리며 나빌레라 턴을 하며 무대를 누비는 발레리나는 내 눈에 가볍지만, 힘 있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턴을 시도했을 땐 아주 크게 실망했다. 왜냐하면 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될 거라고 생각치는 않았지만 너무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물론 나만 턴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함께 시작한 모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자세가 끝까지 유지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여기가 발레의 첫 번째 고난이구나 직감했다. 기타도 F 코드에서 소리가 나지 않으니 싫증을 내고 나가떨어진 전적이 있는 나에겐 발레를 계속하느냐의 갈림길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 들었던 생각은 시작하는 일마다 작은 문제가 생길 때 회피해 버리면 어떤 일도 제대로 완성할 수 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 물러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선택에 내가 책임을 지기로 했다.
무릎을 굽혔다 펴서 생기는 힘으로 도는 턴. 턴을 하지 못하면 사실상 다음 진도를 나가고 다른 안무를 연결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속된 말로 쪽팔린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준다는 건… 정말 힘들다. 동작을 체크하기 위해 한 명씩 연습실 중앙으로 나가 동작을 하면 매번 내 이름이 불린다. “영원씨. 다시.” 그리고 또다시, 다시, 다시… 내 이름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다.
한 발을 천천히 들고 나부끼는 두 팔은 우주를 감싸 안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시선은 지평선 너머로
…
돌고 돌고 돌고 돌아 바다 너머 그대에게 갈 수 있다면
돌고 돌고 돌고 돌아 이 몸이 타올라 재가 될 때까지 나는
눈물로 만들어진 강이 발자국을 따라 원을 만들고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영원히 영원히 맴돈다
피루엣 - 안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은 꾸준히 하는 것밖에 없었다. 오늘 돌고, 내일 돌고, 집에서 생각나면 돌고. 그러다 보니 완벽하진 않지만 턴이 된다. 그것이 인생의 순리다. 예쁜 옷을 입고 우아한 춤을 추기 위해 가볍게 시작한 취미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언젠가는 완벽히 한 곡을 완성해서 콩쿠르에 나가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땐 또 얼마나 다채로운 감정들을 느끼게 될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