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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생명 창조의 숭고 부수기 - SF 연극 '거의 인간' ② [공연]

by 양자연 에디터
2024.10.1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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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이 가능한 몸으로서의 여성


 

모성이 위대하다는 관념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여성의 신체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임출육(임신·출산·육아)의 희생은 어머니의 위대함이라는 모성 숭배로 이어진다. 특히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몸과 떨어질 수 없다는 지점에서 여성성의 특질로 여겨졌으며, 이따금 그것은 여성의 신체를 도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도구화는 여성의 신체를 남성-아님의 몸, 결여된/특수한 몸으로 규정하며 신체의 생물학적 차이를 사회문화적 위계로 전유한다. ‘정상’ 남성의 신체에 없는 ‘특수한’ 것이야말로 여성 신체가 존재하는 당위가 되며, 사회적 위계가 발동되는 순간 남성 권력은 자신들의 그러한 ‘특수성’을 ‘규제’할 수 있으며, 여성의 신체를 단속할 권리가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한국의 남성 권력이 여성 신체를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효과적인 개념은 이분화된 젠더정치로, 그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비체화된 여성 신체에 접합시켜 사회적 수치심으로 그들의 몸을 처벌해 왔다. 이러한 처벌 공포는 남성 권력의 규제를 내면화하며 여성이 자기 몸을 억압하도록 강제한다. ‘성녀’가 추앙받을수록, ‘창녀’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의 몸을 뒤덮는다. 이러한 이분법적 여성 신체에 대한 처벌이 남성 권력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임신중지의 범죄화 역사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195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법편찬위원회에서 수립한 낙태죄는 한국전쟁 이후 인구수 감소 문제와 주권 행사를 위해 최소 사천만 이상의 국민이 필요하다는 국가주의적 주장에 힘 입어 통과되었다.[1] 그러나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 산아제한정책이 수립되며, 낙태죄는 여전히 형법에 범죄로 규정 되어있었으나 정부는 영구 피임 시술과 임신 중지 시술을 무료로 하는 ‘낙태 버스’를 운영하였다. 이후 2019년, 헌법재판소는 낙태죄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판결했고, 임신중지의 합법화가 손에 잡히는 듯했지만 현재까지 관련 법안이 입법되지 않았다.

 

임신중지에 반대하는 이들은 ‘태아의 생명’을 이유로 들지만, 현재까지 임신중지 범죄화의 역사 속에서 ‘태아의 생명권’이나 임신하는 몸으로서 여성의 결정권이 고려된 적은 없다. 정부의 인구 정책에 따라 ‘범죄가 되는 임신중지/비범죄가 되는 임신중지’의 기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결국 임신중지와 관련하여 찬반 논쟁은 ‘태아의 생명권’과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이 대립이 아닌 ‘여성 신체를 억압하는 남성적 국가 권력’과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의 대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존 젠더정치의 성녀-창녀 이분법은 임신중지권에 그대로 전이되어 성 규율을 위반한 ‘창녀’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안에서만 허락되는 ‘정상’ 출산을 한 성녀(어머니)의 대립으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확장한다. 단순한 논리에 따라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의 ‘결정권’은 남성 권력의 처벌 대상이 된다.

 

남성 권력은 이분법의 유지와 존속을 위하여 ‘정상 가족 내 여성의 출산’은 아주 위대하고, 대단하고, 숭고한 행위로 추앙하며 그에 배제된 모든 몸에 수치심을 가한다. 결국 모성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여성의 ‘정상’ 신체의 ‘정상’적 섹슈얼리티를 배제한 모든 몸과 그러한 몸으로 행하는 섹슈얼리티는 ‘창녀’의 것이자, 규율 위반자이자 사회적 처벌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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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간)-예술가-존재


 

과학 기술의 발전이 여성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오히려 새로운 억압의 근거를 제시할 것인가? 과학의 진보는 별다른 논쟁 없이 추구해야 할 긍정적 가치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진보인가? 이러한 진보는 모두 발맞춰 걸을 수 있는가?

 

생명 창조의 기술에 손대는 것은 오래전부터 금기로 여겨졌다. 그 생명을 잉태하여 낳는 일은 오직 성녀/어머니의 몸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며, 임신이라는 여성의 희생이 위대함과 숭고를 더 드높여주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가 지워질수록 모성은 위대해진다. 그렇다면 여성의 신체에서 탈각된 ‘생명 창조’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인공 자궁’이라는 소재를 떠올린다면 임신이 불가능한 몸에 임신 가능한 장기를 이식하는 수술이라던가, 혹은 생명 창조라는 수식어가 어울릴만한 숭고의 거대한 아우라를 지닌 기계 장치가 떠오른다. 예를 들어 메리 셸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EMK뮤지컬컴퍼니에서 제작한 대극장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생명 창조 기계’ 같은 것이다.


SF 연극 〈거의 인간〉은 인공 자궁 기술이 상용화되었으나, ‘낙태죄’가 부활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인공 자궁 기술로 여성의 신체 외부에서 인공 수정으로 잉태가 가능하다면, 성녀-어머니로서 여성의 숭고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성역화된 여성의 몸이 처벌 대상의 대척점에서 사라진 공간을 이 극은 임신중지의 범죄화라는 강력한 국가 권력의 법적 제재로 채워냈다. 남성의 몸과 다른 여성의 몸이라는 것은 언제나 임신과 출산을 준비하는 몸으로서의 예외성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예외성이 탈각된 여성의 신체는 여전히 예외적이고 배제적이다. 결국 목표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여성 신체에 대한 처벌이다. 남성 권력 유지를 목표로 하는 차별을 위한 차별, 처벌을 위한 처벌일뿐이다.


발레리나 ‘재영’은 목사 남편 ‘인수’와 인공 자궁 기술을 이용하여 아이를 가지기로 한다. 공연 예술이 영상 아카이브로 대체된 미래 사회에서 재영은 임신을 계획하면서 동시에 발레리나 인간문화재 1호가 되는 심사를 받을 수 있는 몸이 된다. 공연 예술가로서 임신 상태는 여성의 직업적 성취를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으나, 인공 자궁이라는 체외 기관을 이용한 임신은 재영의 커리어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임신과 모성의 주체로서의 성녀-어머니의 끈적임은 결코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늙은 산부인과 남성 의사는 ‘낙태는 범죄’라고 못을 박고, 간호사는 ‘엄마의 심장박동’을 들려주어야 하기에 ‘엄마’의 몸에 실시간 모니터링이 가능한 기기를 부착하거나 녹음하여 보내달라고 한다. 여성의 신체와 임신이 분리되었음에도 임신을 여성에 할당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그로 인해 언제든 사회는 당신을 처벌할 수 있다는 공포는 여전하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으로 작용하는 것은 오히려 ‘인공 자궁’의 양태다. 어떻게든 ‘성녀-어머니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유지하고 싶은 사회에서, 인공 자궁은 수액 팩과 유사한 비닐 팩이다. 수액 걸이에 덜렁이며 걸려 있는 비닐 팩 2개. 인공 자궁이라고 하면 하물며 플라스틱 통에 LED 조명을 덧대어 ‘대단하고’ ‘숭고한’ 아우라를 지닌 모습이어야 할 것 같은데, 어제도 병원에서 수천 개를 버렸을 것 같은 수액 팩이라니. 자궁에 관한 모든 남성적 이데올로기를 부수는 비닐 팩이 웃음을 참을 수 없이 통쾌하다.

 

남편 인수를 대신하여 재영은 친구 수현과 함께 ‘아기’를 보러 간다. 수현은 “이거 수액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재영은 그 액체가 차 있는 두 개의 비닐 팩을 보고는 가슴이 이상하다고 한다. 엄마가 되는 것은 그런 것인가? 생명 창조의 대단한 순간을 보며 울렁이는 마음을 기록하는 것이 될까? 그 황당한 비닐 팩을 바라보면서도.

 

그러나 재영은 남편 인수가 교회 부목사와 바람을 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수가 아이를 갖자는 이유는 단지 자신과의 관계에 단조로움을 느낀다는 단순한 이유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수와 갈라서기로 한다. 그러나 재영에게는 비닐 팩의 태아가 너무 걸린다. 몸 밖의 작은 무언가가 내 삶의 주도권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아이를 원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인수에게 양육권을 넘기는 것만은 원하지 않는다. 여성의 몸과 분화한 태아는 여전히 재영과 진득하게 접촉한다. 재영은 자신의 확장된 신체와 끊임없이 불화한다.


재영이 날카로운 병 조각으로 비닐을 찢고, 그 안의 태아 모형이 물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아무것도 없는 착상란에서 눈에 보이는 살색의 덩어리가 된 태아 모형이 액체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다. 재영의 행위는 살인인가? 재영은 단지 세포가 든 비닐을 찢었을 뿐인가? 여성의 신체에서 분리된 임신에서 ‘태아의 생명권’은 갑자기 임신중지권의 독보적이고 유일한 권리가 된다. 그러나 출산이 끝난 몸, 그러므로 양육자로서의 여성의 삶은 이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재영은 죄책감에 자신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소명하지 않았고, 결국 낙태죄로 2년 형을 받아 교도소에 수감된다. 비닐 팩을 찢는 행위가 살인이라는 간극 속에서 임신중지에서 고려해야 하는 권리가 무엇인가를 떠올려본다. 임신·출산에서 해방되었으나 모성에서 해방되지 못한 성녀-어머니로서 여성의 몸, 그리고 돌봄 노동자로서 여성의 몸들이 있다. 비닐 팩을 보면서 위대하고 숭고한 임신을 외치는 아이러니에서 실재하는 여성의 몸이 선명해진다. 만약 그 비닐 팩의 이름이 ‘생명 창조 기계’ 같은 것이었다면, 재영이 자신의 외연이 확장되었다는 감각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그것’과 불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질문을 수정한다. 만약 임신중지가 범죄가 되지 않았다면, 그러므로 여성의 신체를 사회적으로 처벌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인공 자궁의 이름이 ‘생명 창조 기계’와 같은 것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러한 기술이 가능해진 현실 속에서 여성은 성녀-어머니를 향한 압박감을 ‘창녀-살인자가 아닌 채’로 발화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재영은 무슨 선택을 했을까?

 

 

참고문헌

[1] 최규진, 〈낙태죄의 역사〉, 《의료와사회》 제8호, 2017, p.26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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