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국보 제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訓民正音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해례본 어제서문(훈민정음 창제 목적을 밝힌 세종대왕이 직접 저술한 글)이다. 세종대왕은 어려운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다. 즉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익히기 쉬운 문자를 만든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선 한 나라의 왕이 백성에게 권력을 나누기 위해 글을 만든 사례는 역사상 세종대왕뿐이다.
신분제, 즉 사람과 사람 사이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하던 시대엔 글은 장벽을 공고히 하는 권력의 도구 중 하나였다. 신분제가 공식적으론 사라졌어도, 잔재가 남아있던 시절엔 글을 쓰거나 읽는 행위 또한 주로 남성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이었다.
많은 여성 작가들은 남성 필명 뒤에 숨어 글을 쓰거나 괴짜, 별종, 심지어 마녀 취급까지 받으며 글을 썼다. 한편으론 글을 배우지 못해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기본적인 알 권리조차 갖지 못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 여건 개선과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며 궐기했다. 이에 유엔은 1977년,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했다. 한국에서는 2018년부터 여성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됐다. 여성의 날이 있는 3월을 맞이하여, 글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거나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여성들, 글을 몰라도 치열한 삶을 살아낸 뮤지컬 속 여성들을 만나보고자 한다.
살기 위해 글을 쓴다 - <브론테> 샬럿‧에밀리‧앤 / <레드북> 안나 / <여기, 피화당> 가은비‧매화‧계화
뮤지컬 <브론테>는 ‘글쓰기에 미친 인간들’인 샬럿‧에밀리‧앤 브론테 자매들이 주인공이다. <제인 에어> 작가 샬럿, <폭풍의 언덕> 작가 에밀리, <아그네스 그레이> 작가 앤은 여자가 글을 쓰는 게 허락되지 않았던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영국 작가들이다. 실존 인물들인 브론테 자매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브론테>는, 자매들의 죽음을 지켜봤단 내용의 편지가 미래에서 도착했단 설정을 배치해 관객을 몰입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했다. 파워풀한 락 넘버 또한 예술에 대한 들끓는 욕망, 불꽃 같은 생을 살다 간 자매들의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그려냈다.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긴’ 뮤지컬 <레드북> 주인공 안나 또한 브론테 자매와 같은 시대를 산 여성 작가이다. 브론테 자매와는 달리 안나는 허구의 인물이기에 극은 더욱 과감하게 전개된다. 안나가 쓰는 글은 보수적인 시대(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은 그저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로서 얌전히 살아야 했다)에 억눌려 감히 표현 못 했던 여성들의 욕망을 숨김없이 그려낸 도발적인 글이지만, 누군가는 그 글로 위로받았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유쾌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운 안나 또한 글을 쓰며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사랑도 쟁취해냈다.
서양의 여성들보다 더한 억압을 받았던 조선의 여성들 또한 글을 쓰며 고통을 치유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다 겨우 돌아왔지만, 정절을 잃었단 이유로 가족에게조차 버려진 여성들이 있었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은 그런 여성들끼리 연대해 동굴에 숨어 살며 글을 쓰는 이야기이다. 동굴의 이름은 화를 피하는 곳, ‘피화당’으로 가은비, 매화, 계화는 피화당에서 글을 써서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그녀들은 패배한 병자호란을 모티브로 한 여성 영웅 소설 <박씨전>을 창작해, 자신들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만큼은 승리의 서사를 이뤄낸다.
편지로 시작된 사랑 - <키다리 아저씨> 제루샤 / <시라노> 록산
‘존 그리어 고아원 제일 큰 언니’ 뮤지컬 <키다리 아저씨> 주인공 제루샤 에봇은 ‘Daddy long legs', 즉 키다리 아저씨에게 후원받아 대학 생활을 한다. 제루샤가 반짝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은 영민함, 씩씩함, 사랑스러움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재기발랄한 글재주다. 대학 생활을 보고받기 위해 편지를 요청했던 키다리 아저씨는 어느새 그녀의 편지에 진심으로 빠져든다. 감정적으로 휘둘리기 시작한 키다리 아저씨, 즉 제르비스 도련님은 정체를 숨기고 그녀 옆을 맴돈다. 글은 사랑을 얻는 확실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제루샤가 편지를 쓰며 사랑을 이뤘다면, 뮤지컬 <시라노>의 록산은 편지를 읽으며 글의 주인을 사랑하게 된다. 17세기 프랑스 파리, 전쟁으로 어지러운 시국.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결혼으로 팔려 갈 위기에 처한 록산은 그럼에도 똑똑하게 위기를 헤쳐 나간다. 극장에서 만난 잘생긴 청년 크리스티앙에게 반한 록산은 그가 말까지 잘한단 걸 알고 급격히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록산이 사랑한 편지 속 진실한 영혼과 글솜씨는 그녀를 늘 지켜주던 시라노의 것이었다. 평생을 엇갈렸지만, 록산과 시라노는 글로 영혼을 주고받았다.
읽을 수 없어도 살아갈 수는 있다 - <지킬 앤 하이드> 루시 / <맨 오브 라만차> 알돈자
못 배우고, 제대로 된 사랑도 못 받아봤고, 가진 것도 없으니 불행이 당연하기만 한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루시. 레드렛에서 몸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그녀는, 그동안 자신을 함부로 대해온 폭력적인 남자들과는 정반대인 의사 지킬을 사랑하게 된다. ‘당신은 이미 훌륭한 숙녀’라는 말에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버린 루시. 만났던 남자 중 가장 위험한 남자 하이드가 지킬의 또 다른 인격이란 건 상상도 못 한다. 글을 모르는 루시는 지킬이 보낸 도망치란 편지조차, 지킬 친구 어터슨의 목소리로 들을 수밖에 없지만 ‘풀잎처럼 다시 일어서’려 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알돈자는 여관 하녀이다. 또한 거친 노새끌이 남자 손님들의 비웃음과 성희롱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삶을 선택하는 당찬 여성이기도 하다. 늘 무시당하던 그녀에게 어느 날 웬 미친 할아버지, 돈키호테가 나타나 ‘둘시네아’란 새 이름을 지어주며 아름다운 레이디라고 찬양을 퍼붓는다. 제정신 아닌 노인의 헛소리라 믿고 싶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말처럼 자신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돈키호테의 편지를 산초의 입으로 전해 들으며, 돈키호테가 떠나도 둘시네아로서 살 수 있단 희망의 불씨를 봤을지도 모른다.
가장 시 쓰기 좋은 나이 -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영란‧춘심‧인순‧분한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바탕으로 한 실화 기반 뮤지컬이다. 일제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딸이라 어릴 땐 못 배운 채 70~80대 할머니가 된 가시나들이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는 이야기이다. 네 할머니 중 일제 강점기에 공부해 구구단도 일본어로 유창하게 외우는 ‘영란’은 정작 한글은 모른다. 한글을 모르는 게 부끄러워, 어린 손자에게 읽어주는 그림동화 내용을 지어내던 영란. 더 이상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한글을 배우고, 이젠 시까지 쓰며 찬란한 인생을 누린다.
인류의 역사는 타인에게 권력을 빼앗아 오거나, 혹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온 투쟁의 역사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백성을 가엾게 여겨 새로운 글자를 창제했지만, 누군가는 문자라는 권력을 나눠 갖지 않기 위해 타인을 짓밟고 핍박했다.
글을 썼든, 안 썼든, 심지어 읽지 못했더라도 각자의 자리를 치열하게 지켜낸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들. 글을 대하는 모습은 각자 달라도 자신들만의 ‘말’로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갈 권력을 가진 건 모두가 같았다. 더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스스로의 고유한 말과 글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빛으로 밝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