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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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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눈이 함빡 내리더니, 청단풍나무가 양옆으로 그늘을 만드는 산책로가 깡깡 얼었다. 길의 앞뒤로 흰 주단 몇 필을 깔아놓은 모양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다. 줄타기하는 광대처럼 두 팔을 장대 삼아 몸통을 뒤뚱거리며 중심을 잡는데, 주황색 야광 바람막이를 입은 할머니는 등산 스틱을 얼음에 퍽퍽 꽂아 넣고 금세 앞질러 걷는다. 할머니의 속도를 시기하다가 왼발이 한번 미끄러지고 나서야 다시 상·하체를 반대로 쭉 뺀 채 중심을 잡는 일에 집중했다. 일단 산책로에서 벗어나려면 걸어야 한다. 산책은 천천히 걷는 일이지만 휴식이고, 빅토리아 시대에 귀족 여성들의 낭만주의적 일상이고, 철학자들의 몽상법이고, 유유자적하는 선비의 사색이다. 그러므로 산책의 목적은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자가 자신의 움직임에 목적이 없음을 과시하는 일이다. 이러한 “목가적인 산책이 실용적인 보행이 되는”[1] 순간은 노동자, 빈곤층, 홈리스의 것이다. 노동자의 출근길, 교통비의 문제가 개입하는 빈곤층의 이동과 홈리스의 수색은 언제나 목적이 뚜렷하다. 혹시나 손에 깃발이나 피켓이 들려 있거나,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거나,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있다면 산책이 가능하리라는 꿈조차 꿀 수 없다.

 

좋은 산책을 위한 공용지는 구매할 수 없다. ‘좋은 산책로’를 얻기 위해서는 길 주변의 집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런 ‘좋은 산책로’에는 무엇이 있냐 하면, 이성애 규범성에 기반한 가부장제에 복무하는 ‘정상 가족’이 있다. 정상 규범에 속하는 이들만이 좋음/나쁨의 가치를 구분할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정상 가족'이 존재하는 곳은 자연스럽게 안전하고 건강하고 도덕적이고 올바른 공간으로 여겨진다. 좋은 산책로에는 유명 건설사 아파트를 구매할 수 있는 비슷한 수준의 계급 집단이 있고, 까르륵대는 아이들의 기절할 듯이 높은 웃음소리가 있다. 유명 건설사 아파트는 아파트 단지로 향하는 모든 출입구에 창살을 치고, 창을 든 경비병 대신에 ADT캡스를 세워뒀다. 아파트 단지는 중세 영주의 성이 되고 보행자는 성체화된 아파트 단지 경계를 따라 둘레둘레 걷는다. 아파트 단지 맞은편에 ‘2019 아파트 조경 대상 수상’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입주민이 아니면 들어갈 수도 없는 ‘성체’가 조경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왜 공유 도로에 붙여 놓는지, 그들의 마음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경비실에 인터폰을 누르고, 조경 대상에 축하의 말을 건넨 후 구경하고 싶으니 열어달라고 말하면 열어주지도 않을 테면서. 아파트는 도시에 뻥 뚫린 구멍이 되어 보행자의 걸음을 막는다. 산책로 옆 주택은 대문 앞을 비질하고 그 위에 수면 바지를 미끄럼 방지용 매트를 대신해서 던져놓았고 중세 영주의 성은 입주민이 밟는 창살 진입로'만'을 쓸어두었다. 그 옆에서 모두가 뒤뚱거리면서 종종걸음으로 양팔을 벌려 펭귄이 된다.

 

산책은 계급화된 값비싼 취미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노동자, 빈곤층, 홈리스는 산책에 실패하고 아파트 단지 내부 아름다운 조경을 보며 거니는 상류층의 산책은 성공한다.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 산책만이, 무엇을 찾지 않아도 되는 산책만이, 집을 나서면 바로 앞에 존재하는 길의 산책만이 성공한다.

 

‘산책하자’보다 ‘마실 가자’라는 말에 쉽게 동한다. 산책은 그 자체로 ‘하는’ 것이라 실패하기 쉽지만, 마실은 ‘가는’ 것이기에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실패하지 않는다. 실패의 유예기간을 벌어두고 나면 삶이 조금은 연장된 것도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빙판 위에 발이 묶여서 목적지로도 집으로도 가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내린 눈을 자신의 두 발로 꼭꼭 눌러 다졌고, 낮의 기온에 살짝 녹은 물은 해가 진 후 귀신같이 얼어붙어 미끄럽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산책은 잉여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재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일이기에 제설 작업의 대상에서 제외될지도 모른다. “모래주머니라도 있으면 오지랖 넓은 노인네들이 다 뿌릴 텐데.” 누군가 말했다. 산책로는 보행자들에 의해서만 정비된다. 그러니 한 발짝마다 생과 사를 가르는 쾌속 황천길로도 쉽게 변화한다.

 

마실의 경로는 언제나 비슷한데 도착점은 산책로 근처에 위치한 세 개의 도서관 중 하나가 된다. 털장갑에 갇힌 손가락들이 제각기 얼어가고 찬바람에 콧물이 물처럼 흐를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황천길에서 탈출했다. 도서관은 언제나 방문자로 만석이다. 얼어붙은 길과 영하의 날씨 때문에, 산책에 실패한 홈리스 할아버지도 나와 같이 도서관에 간다. 사적 공간의 점유 비용을 내기 어려운 빈민층도 나와 함께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은 산책에 실패한 자들이 저지당하지 않는 공간이다. 앞을 막아서는 창살과 경비병이 없는 도서관은 폐쇄된 성체의 유명 건설사 아파트 단지와 대조되며 공간의 개방성과 공공성을 담보한다. 그러니 출판계가 소비문화 중심의 ‘텍스트힙’을 형성한다면, 오래된 도서관은 소비/생산의 이분법을 벗어나 산책의 유유자적함을 전유하며 ‘텍스트힙’을 배반한다. 공간 상실·시간 상실, 분배의 불평등을 겪는 사람들은 도서관을 제패하며 자신들의 방식으로 공간을 이용한다. 코 푼 휴지를 가득 쌓아둔 아저씨가 시야에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서, 삼면이 다 바랜 책을 집어 들고 종이에 붙은 누구 것인지 모를 덩어리들을 손톱으로 건드려 뜯어내며 그게 분비물이 아니길 바라면서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공간을 이용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책 세 권을 골랐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과 김윤영의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빌렸다. ‘루소를 최근에 어디서 읽었는데’하고 생각하다가 울스턴크래프트의 분노가 향한 대상이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화장실에서 힘껏 코를 풀었다. 따뜻한 물에 손도 녹였다. 목도리를 고쳐 매고,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누군가 방금 반납을 한 듯이 한겨울 찬기를 머금은 책 몇 권이 도서 반납대에 놓였다. 쌓인 책들의 온도가 제각각이다. 책을 꺼내 내려놓은 그 사람도 손을 호호 불면서 갔을까, 따뜻한 도서관의 히터 바람에 양 볼과 코끝이 빨갛게 달아올랐을까. 책이 이렇게 차갑게 얼어붙을 때까지 얼마나 걸었을까. 돌아갈 곳이 있었을까, 마실을 나왔을까? 눈길에서 혹시라도 넘어지지는 않았을까.


 

참고문헌

[1]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반비,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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