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수수한 것은 곱씹을수록 달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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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려한 세계를 동경한다. 즐비한 옷과 액세사리들, 조명이 내리쬐는 호리존에 울리는 리드미컬한 셔터 소리는 먼지 쌓인 심장을 뛰게 한다. 그 공간에 내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일념으로 현장 스태프가 되었다. 하지만 이내 개인적인 사정과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그만둔 경험이 있다. 그리고 생각난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이하 교열걸). 교열걸은 화려한 세계를 동경했지만 수수한 일을 선택한 한 여자의 이야기다.
10년 만에 출판사에 입사했습니다
매년 경범사의 채용 시즌이 되면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있다. 패션지 에디터처럼 스타일리시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면접을 보러 온다. 무려 10년간. 달리 말하면 9번은 떨어졌다는 것. 시골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며 화려한 세계를 동경하던 에츠코에게 패션지 < Lassy >
(이하 랏씨)는 꿈 그 자체다. 에디터라는 목표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그녀는 몇 년도, 몇 월호의 어떤 기획에 들어간 아이템인지는 물론, 사소한 각주까지 외울 정도로 잡지에 진심이다. 패션지 편집자 채용 예정이 없었던 10번째 면접 날에도 완벽한 차림새로 나타난 에츠코는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한다. 그리고 면접관 중 한 명의 넥타이핀을 보고 어떤 브랜드인지 질문하며 직접 매장에 방문하기도 한다. 이런 그녀의 탁월한 관찰 능력을 높이 산 교열부 부장이 에츠코를 합격시킨다. 입사 첫날, 출판사에 교열부라는 존재감 없는 부서가 있는지도 몰랐던 에츠코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 그저 잠깐 몸담는 동안 실적을 내서 부서 이동을 하고자 하는 그릇된 열정만 있을 뿐.
교열부 사람들은 하나 같이 꾸밀 줄 모르고 개인플레이가 심한 ‘수수한’ 사람들이었다. 한자 읽는 방법이나 사소한 논리적 오류 따위를 빨간 펜으로 끄적여 편집부에 넘겨야 하는, 즉 잠시 거쳐 가는 장소. 일을 잘한다고 티가 안 나지만, 실수하면 모두 교열자 잘못이 된다. 눈에 띄는 실적을 내기 어려운데, 일이 잘못되면 책임의 소재가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수수하게만 보이던 사람들은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집의 구조를 모형으로 만들어 확인하고, 특정 분야의 전문 장르물이라면 그 분야를 빠삭하게 공부하기도 한다.
부서 이동의 기회를 잡아라
교열 일이 익숙해진 에츠코는 잡지사의 교열 협력 요청을 받고 랏씨 사무실에 파견을 가게 된다. 평소 좋아하던 패션에 관한 내용과 각주를 확인하는 일에 그녀의 얼굴엔 활기가 돈다. 언젠간 편집자의 입장에서 이 사무실을 방문하리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관심이 있는 주제를 교열하니 속도가 붙어 일은 속전속결로 마무리된다. 아니 된 것 같았다. 너무 들뜬 나머지 브랜드명이 들어간 각주를 잘못 교열하게 된 것이다. 교열자의 기본은 정확한 사실을 기반으로 할 것. 주관적인 감상이나 의견으로 원작자에게 충고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에츠코는 자기가 맡은 자리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편 랏씨의 편집장은 에츠코의 교열 중 ‘5년 전과 똑같은 기획’이라는 지적을 보고 감동을 하여 그녀에게 기회를 준다. 봄 특대호 기획 PT에 참여할 기회를 얻은 에츠코는 이날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준비한다. 하지만 교열 일에 치여 미처 기획을 마무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랏씨의 에디터이자 고향 후배인 모리오의 자료를 받아 발표하려다 그만둔다. 이유는 자기가 만들지 않은 아이디어를 제 것처럼 발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잡지에 대한 열정이 넘치지만, 올곧은 성정으로 남도 자신도 속이지 못하는 에츠코 다웠다.
랏씨로 이동할 사다리를 제 발로 차버린 에츠코는 후회하면서도 한 구석엔 교열이라는 일에 대한 애정을 확인했다. 내 자리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일에서 나만의 즐거움을 찾는 것. 수수하고 드러나진 않지만, 무언가 완성되는 데 반드시 필요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일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제야 그녀는 교열을 랏씨로의 부서이동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자각을 갖게 된다.
수수하지만 굉장해!
에츠코는 자신이 전혀 꿈꾸지 않았던 교열부에 들어가 많은 것을 배웠다. 가장 먼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알고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는 모두 섬세한 판단으로 이야기의 사실감을 높여주고, 모두가 읽을 때 설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또한 일을 위해서는 혼자가 아닌 동료들과 함께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즐거운 교열의 시작임을 깨달았다.
교열부 사람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하에 위치한 사무실 탓에 조용히 할 일을 하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에츠코가 패션을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일을 더 당당히 좋아해도 된다는 긍정적인 바람이 불게 됐다. 그 후로 교열부의 분위기는 밝고 활기차졌으며, 각자만의 개성 있는 교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고에서는 틀린 부분을 찾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선 각자의 멋진 점을 찾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많은 일이 있고 이후엔 에츠코가 랏씨의 교열을 전담으로 맡는 교열자로 일하게 되며 자신의 재능과 좋아하는 일을 동시에 발휘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녀는 에디터의 자리가 아니더라도 랏씨를 영원한 바이블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에겐 수수해 보이는 일이 사회엔 반드시 필요하고, 그런 수수함이 나에게 설렘과 긍지를 가져다준다면 외부의 시선 따윈 상관이 없다. 한순간에 느껴지는 강렬한 맛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플레인 요거트, 절편, 혹은 흰쌀밥처럼 씹을수록 은은한 단맛에 끌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수수하다는 건 볼품 없는 것이 아닌, 마음을 끌어당기는 은은한 감칠맛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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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츠코를 볼 때면 촬영 현장보다 글을 쓰는 일에 매력을 느낀 내가 겹친다. 언젠가 또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모두가 수수해 보이는 일에 편견을 거두고 진짜 원하는 것을 찾을 용기가 있기를 바란다. 나만의 설렘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겐 가장 멋진 일이 아닐까? 수수함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설렘 어린 노고를 알아차릴 수 있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 소설의 옮긴이, 잡지의 판권 등 작은 노력의 흔적들을 지나치지 않고 눈으로 훑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김영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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