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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K는 길을 잃었다는 느낌, 너무 멀리 낯선 곳까지 와버렸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때껏 누구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보지는 않았을 듯했다. 공기 성분마저 고향과는 다른 듯한 낯선 느낌,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낯선 느낌이었다.”

- 카프카, ‘성’

 

 

프란츠 카프카가 세상을 떠나고 생전 그의 친구였던 막스 브로트는 한 쪽지를 발견한다. “내 마지막 부탁입니다. 내가 남기고 가는 것 중에 공책과 원고와 편지, 그리고 스케치 등등은 읽지 말고 남김없이 불태워 없애주기 바랍니다.”


생전에 작품 활동으로 명성을 얻거나 상을 받은 적도 없던 카프카였으나 브로트는 지속적으로 친구의 문학 활동을 부추겨왔다. 그런 그에게 카프카의 마지막 부탁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카프카의 죽음을 “참사”라고 여겼기 때문일까? 생전에도 카프카의 작품을 출간하는데도 작가와 씨름하곤 했던 브로트는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카프카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사후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일한 브로트는 그 모든 과정을 친구를 부활시키기 위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카프카가 원하지 않았던 수십 년 후 소송의 시작이 될 줄 그는 몰랐을 것이다.


막스 브로트가 사망한 후 브로트의 비서에게 남겨진 카프카의 유고는 비서의 죽음 후 두 딸이 상속 절차를 밟으며 그들의 소유가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이 그들에게 상속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거의 10년에 걸친 법적 분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미국-이스라엘 베냐민 발린트가 재판 과정 및 카프카와 주변 인물들의 생을 추적하며 옴니버스 형식으로 서술한 책이 바로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이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항상 내게 해가 되며, 내게 해가 되는 것은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닙니다.”
 

- 언젠가 카프카가 브로트에게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표지.jpg

 

 

“저마다 합법적인 수단으로” 이스라엘 국립도서관과 마르바흐 독일 문학 아카이브 그리고 상속녀 에바 호페가 소송에 끼어든다. 누군가는 본 재판으로 이스라엘과 독일에게 계속 중요하게 남아 있는 문제들이 명료하게 밝혀질 수 있다고 했겠으나, 독일과 이스라엘은 각각 국가적 과거와 관련된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들어왔다. 독일은 이스라엘이 카프카의 원고를 학술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있는지에 의문을 제시했고, 이스라엘은 그에 반감을 표하며 독일이 카프카와 같은 유대인들의 것을 제대로 보존한 적이 있는가 하고 반론했다.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달랐지만, 카프카를 자국에 영광을 안겨다 줄 우승 트로피로 여기는 점은 마찬가지였으며, 양측 다 이 작가를 국위 선양의 도구로 여기는 듯한 모습이 서술된다.


저자는 결과적으로 카프카가 남긴 유고를 얻게 된 이스라엘이 소송 내내 얼마나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는지 서술한다. 이스라엘은 카프카 광풍이 일었던 적도 없었으며, 자국 문학 비평가들이 카프카에 대해 많이 다루지 않았으나 그의 유고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유대인들이 만들어진 모든 문화 산물에 대한 소유권을 그들이 주장할 수 있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이사회 의장인 다비드 블룸베그가 “도서관은 유대 민족의 소유물인 문화재를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언급한 부분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이스라엘에서 카프카의 사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독일적 속성에 대한 거부감 및 건국 이전의 디아스포라 문화 전반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나아가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 작고 불안정한 나라가 문화적인 위신을 얻기 위해 카프카를 얻고자 했다는 것이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이라고 짚어낸다.

 

 
“나는 문학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학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고, 문학 아닌 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 1913년 카프카의 편지

 

 

책에서 상속녀 에바 호프는 “카프카를 유대 작가로 들이밀다니 터무니없지, 그분은 본인의 유대적 특성을 반기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생전 카프카는 시온주의에 “경탄하기도 하고 시온주의를 혐오하기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책에서 소개한 카프카의 일상 중, 그가 시온주의 집회에 참석하려다가 그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점이 시온주의를 향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카프카가 “실현의 문턱에서 망설이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가 연인과의 관계에서, 유대민족의 야심,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를 대할 때 똑같은 입장을 취했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카프카가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브로트에게 히브리어 편지를 주고받자는 부분은 그가 “가장 유대적인” 작가라고 불리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카프카의 다른 친구였던 펠릭스 벨취는 카프카 부고에서 “이 언어에 깃든 영혼은 속속들이 유대인의 영혼이다”라고 쓰며 그가 가진 모든 신념은 유대 세계관의 신념이 연결되어있다고 했다. 어느 독자들은 카프카의 우화에 나오는 동물들이 유대인의 망명, 타자성, 자기 소외의 상징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저자는 카프카의 선천적인 본향이 독일 문학에 있다고 언급한다. 괴테를 가장 높이 평가했던 그를 카프카 전집 독일어 비평판의 편집인 중 하나였던 마르트 로베르는 “괴테는 그의 성경이었다”라고 언급했고, 브로트 역시 “카프카가 경건한 얼굴로 괴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일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라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카프카는 생전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이 점이 사후 그의 소속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살아생전 팔레스타인에 닿지 못한 카프카를 떠올리며 에바 호프는 “카프카라면 이런 데서 하루도 못살걸”이라고 언급했다. 그렇다고 그가 독일인일까? “아무 오류 없는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독일어는 여전히 남의 재산이지요”라고 그가 말했듯이, 카프카에게 독일어는 온전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언어 유산이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으니, 온 세상에 속해 있다”

 

- 울리히 라울프 독일 문학 아카이브 마르바흐의 소장,

다큐멘터리 <카프카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저자는 소송에 엮인 여러 이해관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풀어내면서 동시에 카프카의 인생, 브로트와의 우정을 들려준다. 카프카의 유고는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의 소유가 되었으나, 여전히 누구도 그의 소속이 어디인지 명확히 가리지 못한다. 사실, 이미 충분히 스스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듯한 작가의 말과 흔적이 가득함에도 사후 이런 소송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저자 역시 “일정한 거처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데 몰두하는 작가에게 소유적 태도를 취했다는 것도 이 마지막 소송의 수많은 아이러니 중 하나”라고 말한다. 구속되고자 하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 어느 면에서는 구속된 아이러니함은 무엇보다도 카프카가 가장 바라지 않던 결말일 것이다. 책을 덮자, 표지에 “카프카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 물음에 바로 책 어디선가 저자가 소개한 텔아비브 시인 랄리 미하엘리의 말을 떠올려본다.


 
“내 관점에서 보자면, 카프카 원고가 가 있어야 할 곳은 저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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