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왕빙에서 시발한 비평의 비평의, 비평? [영화]

영화<청춘(봄) (靑春)>(왕빙, 2023) / 책<익사한 남자의 자화상>(강덕구, 2023)
글 입력 2024.03.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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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비평의 비평’이라고 온점을 찍었으면 완벽한 제목이 되었을 텐데. 비평이 될 수 없는 글이라 물음표를 붙이게 됐다.


두어 달 전의 일이다. 시네마테크KOFA에서 2023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 중 하나로 상영된 <청춘(봄)>을 보았다. 내 기준으로는 무자비한 러닝타임 때문에 고민되긴 했으나,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 청년 노동자의 삶을 ‘청춘’이라고 이름 붙이는 영화에 할애하는 시간을 따지고 싶지 않다는 위선으로 어쨌거나 보러 갔다. 스크린을 바라보며 내내 기다렸다. 무언가 말을 걸어오는 이미지를 만나기를, 천근 같은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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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관을 나오면서 허탈했다. 나는 아무 이야기도 알아먹질 못했다. ‘열악한 의류 공장 단지에서 일하는 중국 청년 노동자들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일하고, 먹고 말하고 사랑하고 협상하고, 다시 숨쉬듯 일합니다. 재봉틀 앞을 벗어난 다른 가능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 문장을 3시간 32분 동안 느린 배속으로 되풀이해 들은 기분이었다. 분명 내뱉어져야 하는 문장들이긴 했으나, 그렇게나 더딘 밀도일 필요가 있었을까? 값싼 중국제 물건이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경제 구조에 의존하면서 그 뒤를 어떤 노동이 떠받치고 있는지는 외면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처벌인 것일까? 벌을 받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 시간 꼬박 이 영활 보고도, 좋았다는 말이 나온다고? 그렇다면 분명히 나는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가 그들에겐 닿았다는 뜻이 될 텐데. 시네필들이란. 언제나 생각했듯,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영화잡지 35호에서 <청춘(봄)>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정성일 평론가의 “피땀을 지불하고, 청춘을 바쳤노라”. 이 글은 5쪽이 넘는 지면을 꼬박 할애하여 민공이 탄생하게 된 중국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문화혁명, 대약진, 조용한 혁명-자유시장의 성립, 후커우등록조례, 외래노동자-이등 인민-‘도둑들의 천국이자 창녀들의 캠프의’-민공의 탄생. 그리고 왕빙의 시학은 그러한 민공의 착취 당하는 운동을 거짓 없이 증언하는 자리에 서 있는 데서 연원한다고 이어서 설명한다.


좋은 글이었다. (좋은 비평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런데 영화보다 글이 더 좋았다. 아니, 사실 영화보다 영화에 대한 글이 더 좋게 느껴지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고, 글이 좋은 만큼 영화에 대해서는 의문이 더 커졌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정말로, 민공이라는 역사적 모순에 대한 진실한 증언이라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박수받아 마땅한 것일까?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떠도는 길에 <마테리알>이라는 영상비평플랫폼에서 “비평의 비평”이라는 일련의 발표문들을 읽게 되었다. 김태원이라는 필자는 정성일을 ‘교사, 교도관의 비평가’의 전형으로 일컬으며 그 반대편의 젊은 영화 평론가로 강덕구를 언급한다. 그리고 “아무튼 <왕빙은 어떤 문제인가> 같은 포스팅에는 일독을 권”했으니, 그건 정확히 나를 위한 권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또 다시, 시간이 지나고, 강덕구 평론가의 글 모음집인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이라는 책을 읽어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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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읽어봤다’고 말해도 될지를 모르겠다. 제대로 이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에 쥐가 나는 글을 더듬어 읽는 일은 압축적인 공부 같아서 아주 가끔은 즐거울 때도 있지만, 멈추지 않는 현학(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의 도미노는, 도무지…… 그저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이 책의 독자층에서 나는 월플라워(wallflower)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긴 하다. 비평의 장 내에 붙일 대자보를 비평계의 존재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온 외부인까지 이해하도록 써 내릴 이유가 없었을 테니. 결과적으로 나는 가치를 논하긴커녕 분석을 시도할 만한 시야조차 확보하지 못했고, 그렇게 어떤 메타비평에 대한 외부인의 감상 정도만 남았다. 비평의 비평의 비평, 뒤엔 큰 물음표가 붙는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감상을 남겨 본다.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에 실린 다수의 글들이 그렇듯 “왕빙은 어떤 문제인가?”는 메타비평의 성격을 띤다. 왕빙의 영화에 대해 ‘한국의 영화평론가들이 늘어놓은 상찬’에 대한 반박문이며, 그러한 상찬이 나오게 된 비평계의 현황에 대한 평문이며, ‘왕빙이라는 문제’가 비평계, 더 근본적으로는 영화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에 대한 진단문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청춘(봄)>이 나오기 전에 쓰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전의 영화들에 대한 분석에서 <청춘(봄)>과 동일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화적 문법도, 의도도, 서사도 없는 이 영상을 영화라 부를 수 있을까? 어떤 평론가는 그의 영상이 영화일 뿐만 아니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 말한다. … 그걸 보지 못한 나는 빌어먹을 바보인가”.
 


정말이지, 이 문장들만은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쓴 것 같다. 즉, 왕빙의 영화에는 형식과 구조를 찾을 수가 없다. 실재가 표상의 통제를 벗어난다. ‘미학적 소유권’을 주장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왕빙의 영화들에서 ‘아프리카BJ의 스트리밍 녹화물’과 포르노와 동일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영화적 형식이 부재하는 왕빙의 영화는 영화가 맞닥트린 대단히 현대적인 현상이다. 영화 제작과 비평의 민주화는 양쪽에서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붕괴시켰다. 왕빙은 영화가 붕괴된 데 따르는 병리적 증상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디지털 이미지의 발명에서 시발한 포스트시네마에 대한 담론이 단순히 영화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얼핏 낙관적인 결론 정도에서 갈무리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왕빙이라는 전형을 통해 주장한다. 영화 제작에 입문하는 장벽이 낮아져 영화 미학이 희석되고, 누구나 영화에 대해 평을 손쉽게 남기는 지면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극장 스크린만이 담보하던 고유한 관람 환경까지 소멸한 지금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아니라는 말과는 다르게 과거의 영광을 돌아보고 있음에도) 분명 타당한 지점이 있다.


여기까지는 길을 잃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고 문제의식에 동감할 수 있지만, 그다음부터는 잘 모르겠다. ‘이동진식 평론’과 ‘정성일식 비평’으로 양분된 비평계의 균열을 종식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그를 위한 “‘대중적’이고 ‘시장친화적’인 비평의 문체”의 필요성. 그런데 ‘대중적’, ‘시장친화적’ 엇비슷한 문체도 이 책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역시 나는 그저 불청객, 월플라워였던 것일까. 비평계에 발을 담그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이 책을 들추지 마시오, 축객령이라도 내려줬다면 오히려 고마웠을 것이다.

 

불가해한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이야기들이 정말 비천함에 뿌리를 박고 있는지, 병리, 원죄, 충동, 욕망의 짐승일 도리 밖에는 없다는 인간관이 타당한지, 새로운 언어를 상상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렇게나 무용했는지, 그런 모든 의문은 차치한다. ‘비평이라는 상품’의 시장을 확대하고, 비평의 ‘토픽’을 널리 전파하고 싶다면, 부디 바라건대, 지적으로 충분히 성실하지 못했던 독자까지 너그러이 포용해 주시길. 청원을 남기며 감상을 갈무리한다.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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