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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기록의 의미 - 쓰는 사람 [도서]

쓰는 삶, 창의성과 주체성의 씨앗

by 김효주 에디터
2026.08.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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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빛이 이끄는 곳으로>의 저자이자 건축가인 작가 백희성의 <쓰는 사람>을 읽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이 책은 ‘기록’에 관한 책이고, 마침 내게도 메모하는 습관이 필요할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가벼운 의도와는 달리, 백희성 작가가 메모를 통해 새로운 건축물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너무도 흥미로웠다.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를 하나씩 접할 때마다, 기존에 가졌던 기록과 메모에 대한 생각들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기록과 창의성


 

흔히 기록은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는 것’, ‘과거를 남겨두기 위한 행위’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저자에게 메모는 오히려 미래의 작업을 위한 재료에 가까웠다.


과거에 적어둔 생각은 그 당시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연결고리가 발견된다. 예전에 적어둔 문장이나 관찰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지난 수년간 작성해온 기록을 바탕으로, 건축이라는 본업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한다. 빗방울 실로폰은 가장 인상적인 사례다. 저자는 비 오는 날 발코니의 시끄러운 빗소리가 거슬렸고 그 느낌을 그대로 노트에 적었다. 불편한 감정을 여과 없이 적다, 이 감정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결심해 주변 지인들에게 빗방울에 대한 견해를 물으며 아이디어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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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빗소리를 아름다운 소리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저자는 발코니에 작은 금속 봉을 활용해 비가 오면 마치 실로폰처럼 감미로운 음악이 연주되도록 고안했다. 불쾌감을 솔직하게 적은 몇 개의 기록이 하나의 창의적인 건축물로 탄생한 것이다.


이를 보면, 지금껏 우리는 창의성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창의성은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개인이 보고 듣고 경험하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새로운 상황에서 서로 연결되며 하나의 아이디어가 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일에 가깝다. 지금의 생각을 남겨두는 것은 언젠가 그것을 다시 꺼내 사용할 미래의 나를 위해 재료를 남겨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주체성을 지키는 기록


 

책의 후반부로 가며 더욱 흥미로웠던 점은, 이 기록이 단순히 건축가라는 직업에서 창의성만을 위한 재료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기록을 스스로의 주체성에 힘을 실어주는 또 다른 자아로 활용했다. 누구나 삶에서 주위 사람들의 말에 한 번쯤 휘둘리는 순간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들의 말이 전부 옳은 것처럼 느껴지고, 그렇게 본인의 선택에 자신감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저자는 그런 순간에도 과거 기록해두었던 아버지의 말씀을 바탕으로,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실패와 극복의 과정을 계속해서 기록하며 살아간다.


실제로 기록은 창의성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방향을 안내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가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했던 과거 에세이를 읽어보는데, 신기하게도 나의 글 같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 때와 지금이라는 시간의 흐름 사이에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인데, 이는 그 사이 내가 사는 환경도 변하고, 또 타인으로부터 새로운 조언도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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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떠한 현상에 대한 최초의 생각은 여전히 그 글에 담겨있다. 시간의 흐름에 희석되지 않은 가장 순수한 태초의 감상이 바로 그 글에 있기에, 시간이 지나 글을 다시 읽으면 ‘초심’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록은 내 삶을 순수하고 온전한 나만의 판단으로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돕는 도구이기도 하다.

 

 

 

생각은 꺼내놓아야 비로소 기능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혹자는 기록을 사소한 행위로 여길 수 있다. 그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종이에 적는 것일 뿐인데, 생각을 꺼내 손으로 쓰는 일이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머릿속에만 담아두는 것과, 그것을 종이와 글자라는 유형의 형태로 풀어내는 일은 전혀 다르다. 머릿속에만 있는 생각은 아무리 좋은 생각이어도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래의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전달될 수 없고 다른 생각과 만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일단 밖으로 꺼내놓으면 그 생각은 하나의 형태를 갖추고 누구든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소위 ‘전시 (Display)’되는 것이다. 찬찬히 뜯어볼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건넬 수도 있다.


평소 메모를 잘 하지 않는 나도, 요즘은 생각을 바깥으로 꺼내는 연습의 중요성을 깨닫고 작은 다이어리를 활용하고 있다. 이런 행동은 본업에도 도움이 된다.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몰려도 종이에 쓰면서 일의 우선순위를 구분할 수 있고, 고민되는 부분은 종이에 적어 누군가에게 바로 질문할 수 있다.


일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꺼내는 것도 물론 도움이 된다. 특히 부정적인 생각들을 글로 꺼내놓으면 감정에서 한 발 떨어져 상황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게다가 몇 달 뒤 그 글을 다시 읽으면, 이 부정적인 생각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자주 써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장 기록의 습관을 들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꼭 각이 잡힌 멋진 글이 아니더라도, 핸드폰 메모장에 적은 한두 줄의 생각이 나중에 어딘가에 쓰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적어보는 것이 어떨까.

 

***


<쓰는 사람>은 구체적인 메모의 방법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다. 대신 기록이 한 사람의 창의적인 직업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더 나아가 한 개인이 스스로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가도록 돕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과거의 메모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작은 생각들이 새롭고 독특한 건축물로 이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기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창의성이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기록을 통해 개인의 삶을 돌아보고 해답을 찾고자 하는 모든 독자에게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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