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명분과 속임수 [도서]

왕망: 명분과 속임수 사이를 읽고
글 입력 2022.02.18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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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은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다. 전한시대를 끝내고 자신의 능력으로 새로운 왕조를 개척한 입지전적 능력을 보유했음에도 반란군의 칼날에 목숨을 잃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왕망: 명분과 속임수 사이-왕망의 통치와 한국의 정치 마주보기’ 역시 왕망이라는 탐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의 면모를 집중해 조명한다. 더불어 저자는 그의 통치가 이뤄진 전후 시대를 함께 서술해 혼란했던 중국 고대사를 현재 한국 정치와 비교하려는 시도에 나선다. 비록 그것이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필자에게 그 시도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왕망의 통치에 대해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제자백가와 유교의 탄생 과정부터 시작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라는 대전환기를 맞아 수많은 사상가들이 등장했고 그중 유가, 법가, 도가, 묵가 등이 주요한 세력을 이뤘다. 이 중에서도 현실적으로 가장 많은 환영을 받은 것은 법가의 논리였다. 법가의 논리는 순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시작해 한비자가 ‘법’과 ‘술’로 그것을 체계화했다.


한비자는 군주가 인민을 통제하는 수단인 ‘법’과 관료를 부리는 수단인 ‘술’을 활용해 국가를 부국강병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국가가 부자에게 중과세를 해 그 부를 국고로 이전하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평등하게 만들어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현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일종의 공산주의적인 정책으로서 국가권력에 무한한 힘을 부여하는 태도였다.

 

진나라는 이런 법가의 논리로 무장해 부국을 이룩하게 된다. 위치적으로 중원의 중심에 있지 않았음에도 상앙과 이사 등의 법가 사상가들을 등용한 진은 전국시대의 최강자로 발돋움하며 마침내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하지만 만사가 그렇듯 완벽한 이론이란 존재할 수 없다. 법가의 정책은 강국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통일된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시황제는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법가 정책을 강행했으며 이에 반대하는 유가의 서적과 유생들을 탄압했다. 이렇듯 엄혹한 통치로 민심을 잃고 있던 진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시황제의 존재 때문이었다. 만기친람하고 국궁진력하는 그의 카리스마와 권력욕은 진나라의 운영의 동력이었지만 한편으로 진의 멸망을 가속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에서 시황제 사후 진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한다. 신하들이 왕을 옹립하고 암투를 벌이는 한마디로 혼란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혼란기를 정리한 것은 다름 아닌 유방, 한 고조였다. 그는 처음에는 유가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곧 황제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했다. 특히 유방 집단이 가진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은 국가가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반드시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일소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유가에서 강조하는 의례와 예식 등일 것이다. 한 고조는 유가를 적절히 도입해 장기 정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한 고조 사망 후 잠시 혼란을 겪는 한이었지만 드디어 한 무제가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인재 등용, 경제 정책, 대외 확장까지 한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한 무제는 현실 정치에서 무능력한 유가들을 절감하고 법가적 색채를 띤 관료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한 무제는 법가의 현실 통치와 유가의 치장술을 모두 능수능란하게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그였음에도 후계자 선택의 문제에선 아쉬움을 남겼다. 막내아들을 총애해 태자에게 쓴 누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죽이고 만다. 무제 사후 즉위한 소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곽광이 모든 권력을 쥐게 된다. 곽광은 자신을 제거하려던 황제까지 갈아치우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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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의 석상


 

그러나 이렇게 탄탄한 전성기를 달린 한나라 역시 쇠퇴의 길을 피할 순 없었다. 원제가 죽은 후 제위에 오른 성제는 자신의 생모였던 왕정군의 일족에게 모든 국정을 맡기고 만다. 이렇게 외척 왕 씨가 득세하는 가운데 드디어 왕망이 역사 속에 등장한다. 자신의 친척들이 모두 호의호식하며 살 동안 그의 집은 불우했다. 이런 가정환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씨 일족이었던 것도 있었지만 행동 가짐을 겸손하게 처신하고 다양한 명사와 젊은 인재들과 폭넓게 교류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왕망의 처세술은 그를 빠르게 정국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 왕망과 함께 부각되고 있던 순우장을 정치적으로 몰락시킨 그는 대사마와 대장군 직을 맡으며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왕망은 이런 위치에서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검약하는 삶을 보여주며 자신의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물론 그 역시 애제가 등극한 후 정치 일선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하지만 애제 사망 후 곧 정계의 요직으로 복귀했고 이제는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구축했다. 아울러 예제와 학제를 개혁하며 유교를 모든 계층과 지방으로 침투시키는 정책을 폈다.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봉한 왕망은 이제 무서울 것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평제에게 구석을 받고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한다. 평제가 죽자 2세에 불과했던 유영을 황태자로 삼으며 끝내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공식적으로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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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


 

측천무후와 비슷하게 기존 왕조가 이어지는 도중에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왕망이었지만 그는 후대에 그녀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측천무후가 어느 정도 안정된 기반에서 통치 성과를 이뤄냈다면 왕망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는 유가의 가르침에 입각해 여러 개혁에 나선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유가의 이상적인 조처에 가까웠다. 이미 농민들 사이에 사유재산에 대한 인식이 출현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상황이었지만 유교적 이상 정책이라고 평가받는 정전제를 부활시킨다. 이런 그의 판단은 사회 각계각층의 많은 반발을 낳게 되고 왕망은 3년 만에 자신의 정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뿐 아니라 고액 화폐를 유통하며 단행한 화폐 개혁도 광범위한 위조 화폐의 제조로 인해 상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부작용을 낳았다. 대외정책 부분에서도 흉노와의 관계 악화로 인한 전쟁을 치루며 백성들의 부담만 가중됐다.

하지만 전한 말 혼란한 상황은 그 누구라도 개혁의 칼을 빼 들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왕조를 세운 왕망은 이런 개혁을 통해 ‘선양’의 당위를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이유에서 왕망이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 없이 급하게 뛰어들었던 것이리라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선양’이라는 방식으로 황제가 된 그는 유교적 정통성을 매우 중시했다. 제위에 올라서도 그는 유교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자질 있는 군주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그 일환으로 ‘정전제’부활 및 유가 관료를 적극 등용에 나섰다. 하지만 이는 현실성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사실 왕망은 전통적인 유자도 아니었다. 치세 말기에 이르면 주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더욱이 왕망의 개혁이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왕망 정권 수립 과정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왕망은 관료와 지식인의 사익을 보장하며 그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됐다. 결국 왕망은 이들의 사익에 반하나 민생에 도움이 되는 개혁을 추진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것이 왕망이 부패했던 관료들과 지방 세력을 개혁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를 떠안았음에도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했던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렇게 후한 수립까지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왕망이 대두했던 배경과 몰락의 원인을 나름의 논리로 분석해낸다. 특히 저자는 “후한 수립 이후 중국의 모든 왕조는 겉으로는 유교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법가적인 체제를 유지했다(p.195)”고 주장한다. 또한 오랜 역사 동안 법가의 통치를 받은 중국인들은 그런 지배에 익숙해져 권력의 통제를 당연시한다며 중국에서 민주공화정 체제가 수립되길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중국 공산당 정권의 체제가 언젠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구조로 바뀌리라 믿었던 필자로서는 이런 논지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하지만 중국 인민들이 아무리 오랫동안 법가적 체제에서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정보와 기술이 모두 활발히 유통되는 21세기에도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이와 비교해 저자는 “한국사에서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의 군주정치는 중국의 전제군주정치와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민이 만족할 만한 체제였다(p.196)”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외침이 있을 때마다 적은 인구에 비해 동원된 엄청난 병력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과연 동원된 병력만을 근거로 민이 만족할 만한 체제였다고 성급히 추론할 수 있을까? 인구가 훨씬 많았던 동시대 영국의 사례를 단순히 대조하는 저자의 판단 역시 시대적 배경과 세계 각 국가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했는지 아쉬움이 남았다.

 

사실상 맺음말에서 저자는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표현한다. 저자는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이상적 지도자상이 성군(聖君)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동시에 성군(聖君)은 우민(愚民)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며, 이런 우민 개념은 자신들을 어리석은 이들로 치부하는 것으로 민주 사회에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 일축한다. 한편 이런 우민 의식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화주의적 가치관을 함양할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금까지의 민족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국가와 리더십에 대한 고찰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관료(공무원)를 통제할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며 선출직을 늘리거나 선출 권력의 관료 임면권을 강화하자 주장한다. 그리고 복잡화된 현대사회에서 더는 만기친람 하는 지도자는 필요하지 않다며 유교적 정신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정치에 대한 저자의 허심탄회한 비판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선뜻 고개가 끄떡여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문제에 대한 지적은 예리해도 그 대안으로 제시한 의견들이 공허하게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저자가 지적한 우리나라 정치의 문제점들이 비단 한국의 모습에만 한정됐다고 보기도 힘들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민들은 자국의 지도자를 향해 칭찬과 비난을 매섭게 날린다. 마찬가지로 정치인들의 선거가 이미지 메이킹의 대결로 바뀐 점도 만국 공통이다. 이런 작금의 실정에서 한국 사회의 공교육(민주 시민 교육의 부재)을 문제 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공교육을 통해 이상적인 지도자를 뽑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이상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답은 아마 한 가지뿐일 것이다. 바로 “권력의 정통성이란 시대적 과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진부한 상식을 잊지 않는 것(p.214)”이다. 실컷 저자의 주장에 했지만, 마지막엔 결국 그의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선택으로 무능력한 혹은 부도덕한 지도자를 선출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일 테니 말이다. 21세기 더욱더 교묘해진 분장술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권력의 정점에 오르려는 제2의 왕망 출현을 막으려면 끊임없이 의심하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부제처럼 그들의 명분과 속임수 사이를 잘 파악해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해 ‘지난날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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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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