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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당신이 함께 추락해준다면 [도서]

서덕준, 『함께 추락하러 왔어요』(위즈덤하우스, 2026)

by 차승환 에디터
2026.08.1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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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에 속한 존재로서 인류가 본능적으로 추락에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몸은 언제나 아래로 당겨지고 있으며, 다만 발아래 단단한 바닥이 있기 때문에 안전함 속에 있으나, 삶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바닥으로부터 벗어나 추락의 간절함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을 자의적 추락의 욕구라고 할 때, 이 순간 추락은 쾌감이다(공중과 지상을 오가는 놀이기구나 번지점프에 기꺼이 비용을 쓰는 것이 가장 흔하고 단순한 예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 바닥이 사라졌을 때, 안전망 없이 뛰어내리도록 떠밀릴 때, 추락은 무엇보다 끔찍한 공포가 된다. 추락은 쾌감과 공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현상이며, 이것은 육체적 추락과 사회적(혹은 정신적) 추락 모두에 해당되지만, 삶에서는 대체로 추락이 쾌감보다 절망일 경우가 훨씬 더 잦다. 그리고 적어도 두려운 추락의 순간이라면 함께 있어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서덕준 시선집 『함께 추락하러 왔어요』(위즈덤하우스, 2026)를 읽는다.


 

수천을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비문을

수만의 환생을 거듭하는 길목 어귀에 새겨두고

영원 동안 읽으며 진로로 삼는 것이

그것이 사랑이지


- 「사랑은 비문」 전문

 

 

시인이 넌지시 던져둔 우리의 세계는 “수만의 환생을 거듭”하며 삶과 죽음이 끝없이 반복되는 곳이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데, 어쩌면 죽음 뒤에 다시 살게 되는 환생의 과정을 겪을 수도 있는 것.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목 어귀”에는 몇 번을 읽어도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 적혀있다.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죽음으로 향할 때 묘비에 적어뒀던 비문(碑文)일 테다. 삶의 끝에 다다라서야 겨우 얻었던 지혜일수도, 삶을 마치며 남겨둔 후회일수도 있으나, 어쨌든 시인은 우리가 직접 썼던 그 문장들을 “수천을 읽어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 단언한다. 유한한 삶에서 무한히 변하는 세상을 꿰뚫는 진리는 존재할 수 없음에 대한 깨달음일까. 살아가면서 우리가 썼던 모든 문장은 결국 말이 되지 않는 비문(非文)이었을 뿐이라는 것. 그래서 제아무리 여러 번 살아난(간)다 해도 우리는 또다시 길을 잃게 되리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진로로 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바로 “그것이 사랑”(혹은 삶)의 유일한 공식이며, 유일하게 불변하는 가장 정확한 통찰이다.


진리가 없는 비문의 세계, 그 한계를 견디기 위해서 차라리 “사는 것에 증명 따위 필요 없는 그런 / 시로 지은 세계”가 필요할 수도 있다. 다만 그곳 역시 진리의 언어가 아니라 “죄다 시”로 만들어낸, “시 밖으로 도망”갈 수는 없는 비문투성이의 세계일 테다. (「시로 지은 세계」) 이처럼 우리가 만드는 어떤 세계에서도 진리는 결코 전해질 수 없고, 다만 진리에 가까운 진심을 전하는 방식 중 하나는 ‘등’으로 말하는 것이다. “등에는 언어가 있”어서 “뒤돌아 누운 당신의 등에 대고 / 가엽다는 말”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는 것. (「등의 빈틈을 깁고」 “너 오늘도 통증을 등에 업고 삶을 걸었”으나 허무하게 죽지는 말라고, 통증이 쓰인 등을 쓰다듬고 “지문으로 가만히 문장을 읊으면서 꿈으로 하룻밤 도망가는 건” 어떤지 묻는 일. (「너 와락 죽어버리는 거 아니지?」) 매일 밤 그런 일을 우리에게 반복하는 덕분에 우리는 일단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고요한 항해를 시작해요

한 호흡을 우리 동시에 잇다가

함께 숨을 참고

물 밑을 바라보는 그 순간의 광경


중력은 그저 설화처럼

별과 바람이 우거진 하늘은 물 아래 잠겼고

야밤에 도망을 나온 등 푸른 인어들이 있고


흰 돛이 우뚝 서 있는 동안

겁도 없이 치달은 너울에

우린 껴안고 뒤집어진 채


영혼의 틈새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곶과 만이 속속들이 맞닿도록

서로의 영혼을 포개어 끝단을 붉은 실로 꿰매요

그렇게 사랑은 항해를 계속할 거예요


- 「고요한 항해」 중에서

 

 

때로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세상이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삶의 긴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 세상은 분명 “겁도 없이 치달은 너울”이 끝없이 일렁이는 곳일 텐데, 흔들리는 배 위에서 우리의 항해는 과연 고요할 수 있을까. 시인이 제시하는 유용한 항해술은 이것이다. “한 호흡을 동시에 잇다가 / 함께 숨을 참고 / 물 밑을 바라보는” 일을 반복해 나아가라는 것. 숨을 쉬는 것도, 참는 것도, 물 밑에 언뜻 비치는 길을 찾는 일도 우리가 ‘함께’ 맞춰갈 때 발아래 거센 파도는 삶이 올라탈 즐거운 리듬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것. 삶의 파도에 맞서 “우리의 곶과 만이 속속들이 맞닿”을 만큼 밀접하게 결합하면 “영혼의 틈새로” 어떤 역경도 “침범하지 못하”는 단단한 유기물이 되어갈 테다. 그렇게 유기적으로 화합되어 함께 호흡하는 배가 완성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사랑은 항해를 계속할” 수 있을 테다.


물론 이 모든 항해의 과정은 지난하다. 뚜렷한 설계도가 없는 배, 정확한 항해도가 없는 바다, 그러한 현실이 주는 난감은 공포가 되어 빠르게 삶을 잠식한다. 바닥에 물이 차오르고, 당장이라도 시커먼 바다에 빠져 잠길 것 같은 순간, “별과 바람이 우거진 하늘”은 우리가 솟아날 구멍이 아니라 “중력은 그저 설화처럼” 여기며 우리와 상관없는 높은 곳에서 무심히 관망하는 존재처럼 보일 뿐이다. 바닥이 무너지고 우리 삶을 아래로 당기는 중력이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은 온다. 그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무기력하게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진리 없음을 또 한 번 깨달으며 의미 없는 비문을 새기고서 죽음을 향해 추락해야 하는 것인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했어

삼엄한 푸르름이 몰아닥치는 밤의 깊이를 말이야

깊은 어둠의 밀도에 몸을 맡기며

색도 빛도 없이 그저 뛰어드는 너와 나를,

순진한 어둠 속에 잠수하는 우리를 말이야.


자 하나 둘 셋, 하면 우리 같이 두 눈을 떠볼래

밤의 물속에서 반짝거리는 눈동자

잘게 부스러진 달의 파편이 수면을 비추고

폐부 끝까지 밀물 치는 서로의 호흡


(중략)


자 하나 둘 셋,

밤새도록 깊이도 모른 채

서로에게 잠수해볼래


- 「하나 둘 셋」 중에서

 

 

바닥이 너무 쉽게 없어지는 삶. 무너진 바닥 아래는 “삼엄한 푸르름이 몰아닥치는 밤”처럼 짙고 깊은 어둠이 있다. 시인은 그 어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은 만나보지 못한 어둠일 때 가장 두렵다는 것. 차라리 눈을 감고 “깊은 어둠의 밀도에 몸을 맡”겨보는 선제적 경험, “색도 빛도 없이 그저 뛰어드는” 선행적 대처가 막상 어둠으로 추락했을 때 “폐부 끝까지 밀물 치는 서로의 호흡”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것. 도무지 추락하지 않을 수 없다면, 추락 이후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짙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찾아내는 훈련이다. 그 희미한 빛을 등대 삼아 까마득한 절벽을 다시 오르는 과정이다. 두렵지만 반드시 필요할 어둠 속의 그 훈련을, 시인은 기꺼이 우리와 함께 견뎌주겠다고 다짐한다. “자 하나 둘 셋,” 깜깜한 어둠 속에서 힘차게 구령을 외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직하게 단련하며 흘리는 구슬땀처럼 어쩐지 든든한 시가 들린다. 당신이 나의 편일 때 추락은 까짓것 짧은 비상이 된다. 다시 올라갈 희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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