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이 둘이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노말리 [도서/문학]

글 입력 2022.08.1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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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동일한 승객들을 태운 동일한 비행기가 두 번 착륙했다고요?”

 


아노말리(anomalie: 이상, 변칙, 모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세 달의 시간차를 두고 나타난 똑같은 비행기, 똑같은 기장과 승무원 그리고 승객들.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세상은 어떻게 해석할까? 또 자신의 ‘분신’을 마주하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핵심은 이겁니다. 초기술 문명이 ‘가짜 문명'을 시뮬레이션할 확률이 ‘진짜' 문명이 존재할 확률보다 1000배 더 높아요. 이 말인즉슨, 우리가 무작위로 ‘생각하는 뇌’, 나의 뇌나 여러분의 뇌를 선택했을 때 그 뇌가 가상의 것일 확률이 99.9퍼센트, 진짜 뇌일 확률은 0.1퍼센트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자면,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에서 펼친 논증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한물갔습니다. 오히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프로그램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라고 해야죠.”
 

 

 

프로그래밍 된 세계


 

『아노말리』 속 과학자들은 이 기이한 현상을 두고 ‘컴퓨터 시뮬레이션 가설’이 그나마 가장 유력하다고 이야기한다. ‘모의실험 가설’이라고도 하는 이 가설은 쉽게 말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가 사실은 우리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정밀한 시뮬레이션이라는 주장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인간이 이해할 수 없었던 우주 법칙, 이를테면 ‘우리가 여태 외계인을 만나본 적이 없는 이유’와 같은 것들이 해결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뜻이 된다.

 

어떤 세상의 어떤 누군가가 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의 삶이 온전히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 나아가 우리가 했던 모든 선택과 충동과 혼돈과 나아감을 포함해 어디서부터가 우리의 성장이고 어디서부터가 데이터의 충실한 실행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무력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반대로 ‘시뮬레이션된 행복한 자’로 살 수도 있다. ‘어쩌면 삶은 우리에게 삶이 없음을 깨닫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니까.

        

 
내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프로그램으로 정해져 있을까요? 어제 내가 테킬라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맛이 완전히 간 것도 시뮬레이션인가요? 프로그램이 욕망하고 사랑하고 괴로워한다면 어떤 알고리즘으로 그렇게 되는 건가요? 나 자신이 프로그램이라는 걸 알고 길길이 날뛰는 것도 프로그래밍되어 있나요?
 

        

    

분신의 존재


 

도플갱어는 18세기, 장 파울이라는 독일 작가에 의해 처음 사용된 신조어로 걸어다니는 두 명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나 자신과 거의 혹은 완벽하게 일치하는 존재인 도플갱어는 인간의 두려움을 유발한다.

 

우리나라의 설화 『사람이 된 들쥐』에서도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자신의 빈자리를 대체하려 드는 ‘가짜’에게 ‘진짜’는 깊은 두려움과 혼란, 심지어는 살의까지 느끼게 된다. 나를 대체한다는 것은 곧 내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고, 나아가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도플갱어를 마주치면 죽는다.’는 이야기도 이 같은 두려움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노말리』 속에는 다양한 직업과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해 자신의 분신에 대해 그만큼 다양한 태도로 상황을 전개해간다.

 

인간 본성에 따라 조애나는 분신의 존재를 침입자로 여기고, 뤼시는 모든 추악한 면모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자기자신을 타자로서 대면하며 스스로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나 재밌는 것은 이 같은 반응만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슬림보이는 자신의 분신을 ‘마치 타인을 보듯’ 바라보며 든든함을 느끼고 나아가 형제애를 느끼며 기뻐하기에 이른다.

 

과연 나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에 덧붙여, 분신과의 시차가 3개월이 아니라 3년이었다면? 혹은 13년, 23년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가 나거나 3일, 3시간의 근소한 차이가 났다면? 그때마다 반응은 어떻게 달라질까?

 

혹시 자연스럽게 현재 혹은 미래의 편에 서서 생각했다면 반대의 경우도 고민해보자. 과거의 내가 되어 미래의 나를 마주했다면, 어떤 생각을 하고 또 어떤 선택을 내릴까?

 

그 다음에는 범위를 넓혀도 본다. 내가 아니라 나의 가족에게 분신이 생긴다면? 일면식 없는 누군가의 분신이 나타났다는 속보를 접하게 된다면?

 

 
자신의 몰락을 멀리서 구경할 기회가 누구에게나 있는 건 아니다. 자신을 가엾게 여기면서도 자기 연민에 푹 빠지지는 않을 기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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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인가?


 

살인청부업자인 블레이크는 자신의 분신인 ‘6월 블레이크’(이들은 비행기가 도착한 날짜를 기준하여 각각 3월, 6월을 이름 앞에 붙여 구분한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 바로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내듯 어디서 나타난건지도 모를 ‘가짜’가 ‘진짜’의, 혹은 ‘사본’이 ‘원본’의 자리를 탈환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알 수 없다. 누가 원본이고 누가 사본인지. 어쩌면 우리 또한 누군가(사실은 나)의 사본일지도 모르니 이 모든 의문은 의미가 없다.

 

내가 만약 『아노말리』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어쨌든 내가 ‘진짜’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굴러들어온 돌’에 의해 내가 대신되는 것을 지켜보게 될지 모르며,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내 존재가 소멸된다는 가능성 앞의 거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 무엇으로 나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분신과 나는 같은 외모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의 무의식적 행동들 역시 일치한다.

 

너는 가짜이고, 내가 진짜라고 목청 높여 외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려 발코니로 나가 바깥바람을 쐬려는데,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움직인 나의 분신과 난간 앞에서 눈이 마주쳤다면? 그래서 정말 ‘내’가 이 세상이 ‘둘’이 되었다는 걸 실감한 바로 그 순간, 내가 나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나는 반드시 유일한 존재여야 할까? 어떤 근거로?

 

*

 

책장을 넘기는 내내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 난무한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사는 세계와 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했다가, 또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하고, 이 모든 게 정말 ‘아무렴 어떻’다면 우리의 분투와 혼란의 진땀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도무지 해석할 길이 없어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다 결국에는 양분할 수 없는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어떤 것이 둘이면 두배가 되고, 또 어떤 것이 둘이면 반감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나의 존재는 애초에 찾아야 하는 대상이기 보다 나만의 생각과 태도로 계속해서 쌓아가는 미완의 형상일 것이라는 사실 역시 마음에 새긴다.

 

그러니 유일해야만 가치 있는 것이라는 편견도 의미를 잃고, 나는 그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이 최선인 듯싶다. 그것 마저 프로그래밍된 움직임이라 할지라도 '시뮬레이션 된 행복한 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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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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