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만질 수 있는 것(육체)와 만질 수 없는 것(정신)으로 나눠져 있으니, 그 본래의 모양대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이다. 우리는 만질 수 있는 세상과 도저히 만질 수는 없는 세상으로 구분한 다음, 어쩔 수 없이 만질 수 있는 세상에 살면서 결코 만질 수 없는 것들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 그러므로 어떤 시들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대체 왜, 오직 만질 수 있는 우리는 때로 혹은 너무 자주, 만질 수 없는 것들을 염원하며 살아갈까.
최현우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문학동네, 2020)를 읽는다.
먹구름이었다가 점점 날벌레가 되었다 오른쪽으로만 날아다니는 그림자가 생겼다
늑골의 어느 틈에서 소란스러운 날개가 돋아나는 꿈을 꾼다
키우는 개가 모기를 쫓고 있다 외눈이 되어서야 세상이 가까워졌는데 몸은 혼자 멀리 간다
안대를 풀고 상처를 지웠다 오른쪽이 돌아왔는데
개가 나를 쫓는다 눈가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꼬리를 세우고 허공을 뛰며
컹 컹 컹,
무언가 남아 있었다
- 「비문증」 전문
한쪽 눈을 다쳤을 것이다. 안대를 한 오른쪽 눈에 생긴 비문증, 어둠 속에서 “날벌레” 같은 무언가가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한쪽을 가린 눈에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세계, 이를테면 “늑골의 어느 틈에서 소란스러운 날개가 돋아나는 꿈”의 세계다. 절반의 육체성(“외눈”)을 잃고 “몸은 혼자 멀리” 보내졌을 때 드러난 세계의 경험은 강렬해서, 잃었던 시력이 회복되었을 때도 그 세계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증거가 부재하고 증명도 불가하지만 분명한 감각, 비유하자면 ‘호접몽’의 세계다. 이것은 뚜렷한 육체적 세계의 뒷면에서 근근이 존재하는 시의 세계다. 그곳의 주된 질문은 대체로 이렇다. ‘내가 모기인가, 모기가 나인가.’
육체성을 잃자 가려졌던 절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됐다. 그곳은 “하늘에서 하얀 섬광이 번쩍”(「천국」)이듯 드러나서 발견한 사람들이 놀라고 마는 세계이자, 늑골에서 날개가 돋아나 모기가 되어보는 것처럼 얼핏 하나도 쓸데없는 세계다. 그토록 쓸데없는 세계를 마주쳤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발견한 무언가를 오래 응시하며 육체를 새삼 ‘지독한 자세’로 고쳐 앉아보기도 하는 것.
아주 무거운 사랑이라고
그리스 남부에서 발굴된 남녀의 사인은 질식사
터져 넘친 지층, 화산재의 압력 속에서
육천 년을 사랑하다 아직 못한 사랑이라고
서로의 뼈를 끌어안고 썩어버린
화석, 공포를 허우적거리다가
두 인간이 만들어버린 하얀 양각이
사랑이라고
아름답다,
말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전시장 구석에서 귀가 짓눌리고 있었다
(…)
조금씩 베어먹으면 오래 먹을 수 있다
그렇게 말하고 전부 남기고 간 사람의 크기만큼
몸을 옆으로 접어 비워둔 침대 위
혼자서도 복제한 포옹
외연의 핏줄이 다 터진 밤이
곁으로
탈골된 달빛을 밀어넣는다
지독한 자세
수억만 년 압축한 태양 밑에서
계속 눈을 뜨고 있다는 건
나는 모르고 모두가 보는
투명한 골격이 옆구리를 포개고 있다는 건
- 「지독한 자세」 중에서
폼페이 화산재에 함께 묻힌 연인의 시신이 있는데, 그 안에 “육천 년을 사랑하다 아직 못한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허우적거리다가” 육체는 죽고 “서로의 뼈를 끌어안고 썩어버”린, 이제는 “하얀 양각”이 되어 흔적만 남은 사랑에 어떤 쓸모가 있을까. 우리는 굳이 왜 그것을 들여다보며 끝내 “아름답다”고 웅성거릴까. 그것은 사랑이 떠난 침대에서 대신 외로움을 껴안고 홀로 웅크려 “혼자서도 복제한 포옹”을 해본 적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한때 나의 절반이었던 사랑을 잃어본 사람만이, 육체의 절반―어쩌면 세계의 절반을 잃고 쓸쓸히 “지독한 자세”를 취해봤던 이들만이 설명할 수 없이 느낄 수만 있는 것이다. 온전한 육체의 지각에만 기댔을 때 “나는 모르고” 상처 난 마음으로 감각했을 때 다른 “모두가 보는” 것은 “아주 무거운 사랑”이 머물렀던 그런 세계다. 그것은 우리가 “육천 년” 혹은 그보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세계이기도 할 테다.
아이는 사람의 밥과 사람의 말과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 했다 아이는 품에 안겨 잠이 드는 사람의 이마에 키스할 때 상처를 내는 자신의 입술이 싫었고 사람의 눈물이 묻으면 썩어버리는 피부를 대패로 밀어 잘라낸 입술과 함께 자루에 담아두었다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항구로 갔다 방파제에 앉아 별이 떨어졌다던 먼 섬을 가리켰다 고뇌하던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발목이 부서졌고 그때 깨달아 매일 바다를 마시고 정강이를 부러뜨려 모아두었다 아이는 자신의 다리들을 줄로 엮고 모아둔 피부를 바르고 뱃머리를 입술로 장식하여 작은 조각배를 만들 수 있었고 배를 선물 받은 사람은 기뻐했으나 저어갈 노가 없었다 아이는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길고 단단한 코를 가질 수 없었고 상심한 아이는 사람에게서 도망쳐 나는 왜 사람이 아니냐고 소리지르고 다녔다 어느 날 사람은 미움을 받아 세상에서 숨어버린 아이의 집을 찾아갔다가 침대 위에서 절대 부러지지 않는 길고 튼튼한 노를 발견했다 사람은 아이가 먼 섬으로 갔을 것만 같아 항구에 조각배를 띄우고 그날부터 노를 젓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번쯤
피노키오를 타고 떠나왔다
- 「코」 전문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세계의 기원은 이렇다. 한때 우리는 모두 아이였고, 그래서 무한했는데, “사람의 밥과 사람의 말과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하다가 “이마에 키스할 때 상처를 내는 자신의 입술이 싫었고 사람의 눈물이 묻으면 썩어버리는 피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육체와 실용의 세계에서 남들과 다름은 “미움”처럼 느껴져 끝내 “상심”했을 테다. 어른이 되길 스스로 선택하면서, 쓸모보다 존재를 긍정하는 순수의 세계와 차츰 멀어진 우리의 마음은 “상심한 아이”를 멀리 떠나보내고 말았다. 다만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아서 “별이 떨어졌다던 먼 섬”에서 아이는 아직 아이로 남아있을 테고, 우리는 아이가 육체의 죽은 파편으로 남겨둔 흔적을 묶어 바다에 띄워서만 그곳에 도달할 수 있게 됐다. 지금도 아이가 머무는 곳이자 사실은 아이였던 우리가 “한 번쯤 피노키오를 타고 떠나”온 곳, 우리가 쓸데없이 그리워하는 곳은 바로 그곳이다.
어른이 됐고, 멀리 떠나보낸 아이를 그리워하면서 우리는 노래를 부른다. “혼자 집을 지키며 울지 마라 / 까치발 들어 밖을 보다가 / 맨발에 물을 묻힌 아이야”(「섬집아기」) 떠나보낸 무한과 순수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은 쓸데가 중요해진 어른이 돼서야 더 간절해지는 것. 쓸모의 세계는 언제든 우리를 몰아붙이고, “영혼이 위험할 때는 / 살갗이 부어오르도록 가슴을 긁어”대던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 속 가슴팍에는 / 옆으로 넘어진 십자가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음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결심하게 된다.(「X」) 다 크고 더 늙은 어른이 된 지금이라도 “지도가 망가진 배 위에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 방황하는 조타수가 되어서, 추위와 굶주림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다시는 아름답지 말자”는 각오로, “쇄빙선처럼 / 얼음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한 겨울의 조타수」)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간다. “아름답자고, 추악해지자고, 자유와 자유의 실패 속에서 자란다고도, 죽는다고도, 아무것도 아니라고도. 인간의 안쪽으로, 바깥쪽으로, 한 손에는 모래 한줌, 한 손에는 온 우주를 쥐고”서. 그렇게 도달한 곳이 비록 언제나 쓸모없고 “아주 가끔씩만 희망도 절망도 아닐 수” 있을 지라도(「가만히 웃거나 우는」), 우리는 기어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