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를 어루만졌던 것들에 대하여 - 토카타 [공연]

연극배우 손숙 60주년 기념 공연
글 입력 2023.12.0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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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삶에 오랫동안 강력한 기억을 남기는 순간은 정말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큰 인상을 주지 않아 마치 내 방 안에 가장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넣어두고 잊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막상 그 존재를 마주하는 순간에 마음을 사로잡혀 며칠이고 몇 년이고 어쩌면 평생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날도 평소와 똑같은, 모녀간 서로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해 통화하던 중이었다. 잔잔하게 이어가던 대화가 마무리될 것 같은 시점에서 "잠깐만 내가 이런 기사를 봤는데", 하면서 엄마가 주제를 전환했다. 어느 연극배우의 6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 소개 기사를 봤다고 하면서 엄마는 스크랩한 신문을 내게 문자로 보냈다. 20년, 아니 30년 전인가, 산울림 극장에서 그가 나오는 연극을 참 많이 봤었는데, 그 배우가 벌써 연기한 지 60주년이 되었구나. 오래전 추억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엄마에게 나는 먼저 말했다. 보고 싶어? 그렇게 한 달 뒤인가 아빠까지 우리 셋은 공연장으로 향했다.


연극이 끝나고, 부모님을 배웅하고 며칠 뒤, 나는 혼자서 다시 그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이나 배우에 대한 흥미로움보다는 엄마에게 그 배우의 연극을 다시 보여주고, 나와 부모님과의 추억을 하나 더 만들고 싶은 게 목적이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마음속에서 계속 그리던 누군가를 곧 마주할 때 느끼던 설렘을 가득 안은 채로,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내 눈과 귀에 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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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공연장 앞쪽 펼쳐진 무대에는 노란빛의 들판이 자리한다. 늦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을 맞이한 듯한 들판의 왼쪽에는 피아노가, 오른쪽에는 홀로 잎사귀 하나 없이 서 있는 나무와 그 앞에 놓인 의자 하나가 전부다. 거창한 무대 장식이나 효과 없이 피아니스트가 라이브로 들려주는 선율에 따라 세 배우의 연극이 시작된다. 여자, 남자, 춤추는 사람, 그중에서도 무대를 이끄는 이는 60년간 연극배우로 살아온 손숙이다.

 

 

 

여자의 이야기


 

"당신 품에 안겨서, 이렇게 당신 품에 안겨서 눈을 감고 누워서 나는 가벼워져요”

  

연극은 노년을 맞이한 여자의 대사로 시작한다. 여자는 스스로를 머리 위 흩날리는 마른 풀 같은 머리카락과 시간의 낙서가 새겨진 구겨진 종잇장처럼 얇은 살갗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자신을 꼭 안아주고 어루만지는 누군가를 향한 가슴 떨림과 사랑을 표현하며 이어서 여자는 자신의 손길이 닿은, 온기를 나눈 대상들과의 추억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어느 날, 갑자기 떠안게 된 강아지와의 추억, 남편과의 신혼 시절, 이제는 세상을 떠나버린 대상들과의 즐겁다가도 귀찮기도 했지만, 또 눈물지었던 지나간 시간에 관해 말하다가 문득 여자는 나이 든 자신을 되돌아보며 서글픈 마음에 잠기기도 한다. 한없이 발랄하게 무대를 누비며 삶의 순간들을 재현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며 쌓인 고독 때문일까. 체온과 손길을 나누었던 것들이 떠나간 자리에서 그는 조용히 “잠들기 전에 스위치를 내리듯이 이 오래된 생을 탁 꺼버리고 싶어요”라며 되뇌기도 한다.


그렇게 과거에 자리했던 살가운 맞닿음의 부재에 우울하면서 공허한 나날을 보내기도 하지만, 여자는 다시 자신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대상을 향해 사랑을 담아 앞으로 나아간다.

 

“언젠가 그 하얀 실크 가운을 입고 당신한테 올게요. 그 따뜻한 물로 이 메마른 고독을 씻고 부드러운 절망을 걸쳐 입고 당신 품에 안길 거예요.”

 

 

 

남자의 이야기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지. 생각이란 게 있었다면 그럴 순 없었을 거야.”

 

남자는 높이 뻗은 채로 앙상해 보이는 나무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독백을 시작한다. 그는 극의 모든 시간을 의자에 앉은 채로 때로는 덤덤하게 때로는 힘겹게 자신의 일생에서 함께했던 누군가와의 시간과 당시의 마음을 회상한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되었던 첫 만남에서 육체적 관계를 가지면서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했던 인연을 남자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바이러스로 떠나보낸다. 그 또한 똑같은 질병을 앓으며 코마 상태에 빠지고, 이후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나날을 보낸다. 세상과 단절된 시간, 다시는 함께할 수 없는 누군가와의 추억과 손길을 떠올리며 시린 겨울을 보내고 의자에서 드디어 일어날 수 있게 된 남자 앞에 봄날의 햇살이 비춘다.

 

“나는 살아남았어, 눈이 부셔 저 아래 하얀 것. 목련이 피었어. 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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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카타>

(2023.08.19 ~ 2023.09.10 / LG아트센터 서울)

 

 

<토카타>는 접촉하다, 손대다의 의미를 가진 이탈리아어 토카레(toccare)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토카타(toccata)’는 즉흥적이며 기교적 건반 음악의 형식으로 알려진 연주 방식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한데, 이를 제목으로 한 점도 본 극이 보편적인 연극의 형식과는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는 작은 무대 위 지척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으나 서로 교류하거나 대화하지 않는다.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엇갈리는 둘의 대사가 처음에는 상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인가 싶다가도 이내 각자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엇갈리며 다른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의 대사 구성은 꼭 한 문장을, 한 이야기를 이어가듯이, 이 극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극의 일부에 등장해 아무 대사 없이 독무를 이어가는 춤추는 남자는 자신의 고독을, 우리의 고독을 어루만져 주는 상징성을 가지며 그 주제에 뜻을 더한다.

 

여자: 나는 자꾸 재잘거리게 되죠.

남자: 난 네가 팔짝팔짝 뛰는 게 재미있어서, 그걸 또 보고 싶어서

여자: 당신이 말없이 날 안아줄 때면

남자: 네가 아무리 정색을 해도, 진저리 치며 소리를 질러도

여자: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싶어져요

 

극본을 집필한 배삼식 작가는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관계의 단절과 갑작스러운 죽음을 사람들이 겪게 되면서 그로 인해 생긴 슬픔과 충격, 그리고 고독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사회문제가 아닌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심상을 본 극본에 담았다고 한다. 손진책 연출은 “내러티브가 없는 연극이기 때문에 그 낯섦이 분명히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 연극의 매력”이라고 말하며 “이 작품은 존재론적 고독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침잠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의 찬미로 이어지는 그런 작품이 되기 바란다. 그리고 관객이 그 과정을 함께 ‘산책‘하는 공연으로 만들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작가와 연출가의 바람대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과거의 대상, 그와 손길과 감정을 나누었던 순간, 그 시간을 되새기는 두 사람의 모습은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로 관객에게 전해진다. 그렇게 두 배우의 독백과 하나의 안무로 가득 채워진 극은, 과거에서의 상실, 그로 인한 현재의 고독, 그럼에도 내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야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울림과 공감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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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공연 커튼콜에서의 손숙>

 

 

1963년 <삼각모자>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며 손숙은 대학 재학 시절에 연극을 시작했다. 이후 <어머니>, <위기의 여자>, <햄릿> 등의 작품에서 활동하며 한국 연극배우의 대가 중 하나로 이름을 알렸다.


평소 무던한 성격으로 알려진 그는 다리 부상으로 본래 3월에 예정됐던 본 공연이 연기되었을 때 속상한 마음에 지인에게 연락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니 독백으로 이어지는 극의 대사를 충분히 외울 시간이 있어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그의 말에서 무대를 향한, 연기에 대한 그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애정은 일반적인 연극의 구조가 아닌 100분간 독백으로 진행하기에 어려웠다고 했던 본 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자’를 연기한 배우 김수현은 1993년 첫 연극 무대에 오른 이후,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햄릿> 등 수많은 연극 무대와 브라운관에서 활동했다. 30년의 연기 활동을 한 배우로서 그는 <토카타>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행운이면서 동시에 부담으로 다가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몸이 아픈 상태에서 떠나간 인연의 손길과 추억을 떠올리는 그의 연기는 덤덤한 말투 아래 담긴 강렬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해준다.


극의 중간에 등장해 들판에서 춤을 추는 남자 역할로 분한 안무가 정영두는 작품 안에서 벗어나지 않은 안무를 준비했다고 언급했다. 아무도 없는 무대 위 라이브로 연주되는 피아노 선율에 맞춰 홀로 이어지는 그의 춤은 나의 고독과 타인의 고독을 함께 쓸어주는 자연스러운 위로를 건네는 행위를 상징하는 듯하다.

 

*****

 

8월 19일부터 9월 10일까지 이어졌던 토카타의 마지막 공연 날, 커튼콜에는 손숙과 절친한 또 다른 연극계의 대배우 중 하나로 이름난 박정자가 등장해 그의 60주년 공연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관객들과 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한 손숙은 마지막 공연에 대한 소회를 밝힐 때 웃으며 “60주년 공연을 했는데 혹시라도 70주년 해달라고 할까 봐 끔찍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한 사람, 한사람 각자는 하나의 우주다,라는 말이 있다. 60년을 무대에서 보낸 배우의 새로운 도전을 지켜보는 것은 꼭 그만이 창조한 하나의 우주이자 다채롭게 빛나는 별들로 펼쳐진 밤하늘을 마주하는 듯했다. 여러 해가 흐른 후에도 익숙하지 않은 것에 도전해 새롭게 관객의 앞에 서는 그의 모습이 무대 위 다시 자신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는 대상을 찾아 사랑을 고백하던 여자의 모습과 겹친다.


누구라도 살아있다면 피할 수 없는 지독한 고독과 상실을 겪으면서도 내일의 하루를 아름답게 맞이하는 모습을 연기로 표현해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그의 모습과, 무대가 삶이고 살아가는 이유라고 했던 그의 내일에 채워질 다채로움을 떠올려보면 나의 마음도 위안과 설렘으로 차오른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 극을 다시 볼 수 있을 내일을, 그리고 그의 70주년을 기대하고 그려본다고 말하고 싶다.

 

여자 : 나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는 내 입을 닫아버리지 않을 거예요. 

나는 걷고 또 걸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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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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